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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여행/2022 영국 런던 2023. 2. 19. 13:05
눈을 떴을 때 풍경은 퍽 바뀌어 있었다. 유백색 오스마니안 양식으로 가득한 파리에 머물던 내게 빈틈없이 늘어선 빅토리안 양식의 런던 주택가는 영 생경스러웠다. 파리의 베흐시 공원을 출발한 버스는 밤사이 칼레 근교에서 출입국 절차를 위해 한 차례 정차하고, 다음날 새벽이 되어 런던에 진입했다. 런던의 중심부에 가까워지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낮은 층의 건물들은 죄다 적갈색, 황갈색, 흑색 등 파리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색깔을 하고 있었다. 잠결에 런던의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한 나는 구불구불한 템즈강을 따라 거대하게 퍼진 도시의 여러 구역을 보며, 동그란 달팽이 형태로 정렬된 파리의 지리와 전혀 다름에 잠시 걱정스러워졌다.
런던에 오기 전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실 런던은 내가 가고 싶은 곳 중 가장 후순위에 있었다.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였고 그 다음으로 가고 싶은 곳은 베를린이었다. 하지만 둘 모두 실행에 옮길 수 없었는데, 예산과 시간의 벽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마침 여름 성수기가 되면서 하일랜드를 트레킹할 때 묵게 될 숙소의 비용이 크게 올랐고, 트레킹에 필요한 장비와 계획도 부족했다. 베를린의 경우는 시간이 문제였다. 파리에서 열차로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서는 브뤼셀이나 암스테르담을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데 여기에 한나절 시간이 소요되고, 비행기를 이용한다고 해도 공항까지의 이동과 수속 절차를 생각하면 번거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프랑스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낭트나 클레르몽페랑처럼 프랑스 안에서 가보지 않은 곳을 더 여행해볼까도 생각했더랬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굳이 짧은 기간 안에 대충 훑듯이 하는 여행이 싫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런던에 가게 된 건 유럽에 와서 한 국가에만 머물다 가는 게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말고는 없다. 유로스타 티켓을 끊기에는 늦어서 푯값이 크게 올라 있었고, 나는 고민 없이 야간 버스를 타고 런던에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런던의 풍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신구(新舊)의 대비가 극명해서, 파리의 많은 것들이 대체로 오래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Victoria Coach Station)에 도착한 나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새벽의 잠기운을 떨쳐내고 웨스트민스터 방면으로 향하는 빨간 버스에 올라탔다.
카페를 출발해 내가 무턱대고 향한 곳은 웨스트민스터다. 웨스트민스터는 2012년 히드로 공항에서 스탑오버할 때 버킹엄 궁전과 함께 잠시 들렀던 곳이다. 나는 워낙 스치듯이 지나친 이 구역을 다시 찾고 싶어졌다. 나를 태운 11번 버스는 브레센덴 플레이스(Bressenden Place)를 크게 빙 돌아 다시 빅토리아 거리로 돌아온 다음 대법원 앞에서 나를 내려주었다.
10여 년 전 찾았던 이 장소에 데자뷔를 더듬더듬 되새기고 런던아이를 마주보며 웨스트민스터 브릿지를 건넜다. 스탑오버를 하면서 짧게 런던을 찾았을 때보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도시를 둘러보니 분명 새로운 느낌이 있다. 오래된 도심에서 멀지 않은 복솔(Vauxhall) 방면으로 마천루가 거침없이 늘어선 풍경도 새롭기만 하다. 웨스트민스터 브릿지를 되돌아 건너올 때에는 빅벤을 마주보고 걸었다. 신고딕양식의 촘촘한 수직적 외관을 바라보며 과연 내가 북방의 어느 섬나라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입장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파리에 있는 팡테옹의 모델이 된 건물이다. 두 건축물 모두 국위를 선양한 예술인, 문학가, 과학자, 정치인들의 묘가 안치된 곳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찰스 디킨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등의 위인이 모셔져 있다면, 팡테옹에는 퀴리 부부, 빅토르 위고,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등의 위인이 모셔져 있다. 한편으로 두 곳 모두 세계대전에 참전한 무명용사를 기리는 공간이 있다는 점도 똑같다.
차이점이라면 팡테옹과 달리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왕족들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참회왕 에드워드 이래로 왕족들의 묘가 안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왕족들의 경조사가 거행된다. 작년 가을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1981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이 이루어진 곳도 바로 이 장소다.
그에 비해 파리의 팡테옹은 조금 더 탈권위적인 느낌이 들 정도다. 팡테옹에 왕족이나 대통령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왕권의 서사가 돋보인다면, 팡테옹에는 프랑스 혁명 이래로 공화정의 서사가 돋보인다. 팡테옹의 거대한 돔에 기다란 진자를 달아 지구의 자전을 입증했다는 푸코의 이야기 또한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팡테옹에 선명한 대비점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묘의 구조가 계획적으로 갖춰진 팡테옹과 달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크고 작은 묘가 오밀조밀하게 들어서서 더 신묘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이후 사원의 중심에서 빗겨난 참사원 회의장(chapter house)와 회랑(cloister)을 둘러보는 것을 끝으로 다시 거리로 나섰다. 여전히 구름낀 날씨였지만, 볕이 잘 들지 않는 사원을 나서자 살아 있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로 빠져나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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