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부터 일정을 시작하자는 생각은 보기 좋게 엇나갔고, 나는 전날 늦은 시간까지 이동하느라 쌓인 여독에 찌들어 늦잠을 잤다. (전날 차량을 반납하고 숙소에 도착하고 나니 밤 열한 시가 되어 있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른 아침 들르려고 했던 동국사를 막상 가보니 대대적인 공사로 인해 경내를 제대로 둘러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옆에 근대사박물관이 있지만, 나는 신흥동 일본식 주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일제강점기까지 미곡상이자 대지주였던 일본인이 거주하던 공간으로 속칭 적산 가옥이다. 해방 이후로도 마찬가지로 미곡상인 호남제분의 사장 이용구가 거주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옥의 입구를 지나면 자연스레 정원으로 연결되는데, 정원 초입에는 미니어처처럼 축소된 한국식 석탑이 아담하게 놓여 있고 주위에 심어진 나무들을 일본식 마루가 에워싸고 있다. 이곳이 관광지로 개발된 2000년대까지도 광복을 맞이한 상태에서 이처럼 일본식 가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후 나는 모던청와라는 한 카페에 들어갔다. 일본식 주택에서 아주 근거리에 있는 곳이다. 여기서 뜻하지 않게 군산의 민심(?)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무계획으로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뜻밖의 인연이 반갑다. 나는 숙소에서 아침으로 나온 빵이 별로 먹고 싶지 않아 빈 속으로 일정을 나섰는데, 디저트 매대가 비어 있길래 카페 아주머니에게 카페에 먹을거리는 안 파는지 여쭙자 디저트를 취급하진 않는데 삶은 달걀을 조금 나눠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삶은 달걀 하나를 그냥 내어주시겠다던 아주머니는, 접시를 받으러 가보니 달걀을 두 개 준비해 두셨다. 쟁반을 들고 가려는데, 혹시 소금이 필요하냐며 본인 취향은 아니지만 굵은 소금을 종지그릇에 담아주신다. 다시 뒤돌아서려는데 계란 껍질을 처치하기 곤란할 거라며 물티슈를 챙겨주신다. 그러고도 한참 있다가 영 마음이 쓰이셨는지 계란을 여러 개 먹으면 노른자에 목이 메인다면서 커피를 리필까지 해주셨다. 커피 한잔에 너무 많은 서비스가 이어져서 민망할 정도였으니.
덕분에 짧게 머물다 가려던 카페에서 최승자 시인의 책을 펼쳐두고 계란을 까먹으며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햇살이 뜨거운 날이었다. 카페 마당에서 바라다보이는 빨간 제라늄 꽃에 올라온 솜털이 눈에 띌 만큼 강렬한 햇살이었고, 그 더위를 견뎌내는 가녀린 생명체에 놀라움을 느낀다. 나는 충분히 시간을 보낸 후 또 오겠다는 의미 없는 밝은 인삿말을 덧붙이며 카페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