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까지 이어진 긴 추석 연휴다. 연휴 직전까지 뜨거웠던 낮의 햇살도 10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청량한 가을 공기로 차갑게 식었다. 긴 연휴 동안 나는 본가에 머물며, 어릴 때부터 줄곧 살아온 동네를 떠나지 않는 일상을 보냈다. 집을 찾아온 동생 부부와 포켓볼을 치고, 점심을 먹으러 양평에 다녀온 것을 빼곤, 오전에는 카페에서 글을 읽고 오후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날들을 보냈다. 그것도 아니면 티비로 아시안 게임을 보는 식이었다. 그것만 해도 하루가 끝날 때쯤이면 꽤나 피곤한 상태가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연휴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어떻게든 여행을 다녀왔을 것이다. 하지만 뒤늦게 여행 계획을 세우기에는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빠듯하기도 했거니와, 그냥 가만히 그리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도 굴뚝 같았다. 9월이 되어 주경야독하는 생활이 시작되면서, 멀쩡하던 몸의 구석구석이 아파오기 시작했고 휴식이 필요하다는 시그널을 보내왔다. 달라진 리듬으로 인해 긴장된 근육을 풀어보려고 수영도 해보았지만 한 번의 운동으로는 큰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6일간의 꿀같은 휴일은 충전이 필요했던 내게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다.
긴 연휴 천천히 내 안을 들여다보면서 내 안에 많은 불안이 잠재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오래된 불안은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이유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내 안 깊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 불안이라는 것은 여러 이유에서 발현되지만, 그 뿌리를 따라가보면 결국 ‘인정받지 못하는 또는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고고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거꾸로 말하면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 때 불안감은 그 긴 꼬리를 내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신화(神話)와 추문(醜聞)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긍정할 때 내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할 것이다.
햇수로 일곱 살을 맞이하는 강아지는 요즘 같은 날씨에 산책을 하기 가장 좋다. 나는 숨어 있지도 않은 삶의 의미를 너무 많이 좇은 나머지, ‘보통’의 감각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긍정한다는 것은 내가 만든 거대한 성취를 통해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엄마가 만든 갓김치의 칼칼한 맛, 아빠의 손길이 가득한 화초들의 초록빛, 내 몸을 보스락보스락 감싸는 이불의 감촉에서 내 감각이 작동하고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살아 있다는 감각은 오로지 현재 안에만 존재한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바로 지금이 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