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오한 미니멀리즘과 피상적 미니멀리즘의 차이는 개념이 전도되는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니까 더 효과적으로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줄이는 과정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자신을 줄이는 과정 뒤에 따라오는 보상을 받기 위해 의지를 관철하느냐 둘 중 하나다. 이것은 사상으로서의 미니멀리즘이 사물로서의 미니멀리즘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후자는 소유물을 멀리한다는 것은 온갖 문제와 어려움을 멀리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자는 과잉을 멀리하는 행위의 최종 목적은 결국 세상은 엉망이고 불편할 뿐 아니라 보기보다 경이롭고,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깨달음을 암시한다. ―p. 20
미니멀리즘은 전 세계의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반복되는 감각에 가깝다. 우리를 둘러싼 문명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과잉되어 본래의 진정성을 잃어버렸다는 감각이다. 물질적 세계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물질을 더 많이 축적하기보다는 은둔자나 유목민이 되거나 예술로 승화하는 방식으로 물질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편이 더 매력적인 시대다. 이처럼 압도적이면서도 소외감을 일으키는 끈질긴 감각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란 어렵다. 그것이 아마도 미니멀리즘이 이토록 널리 전파된 이유일 것이다. ―p. 39
미니멀리즘 스타일이라는 겉치레는 유기농 식품의 상표, 값비싼 녹즙, 노메이크업 룩을 구현해 준다고 광고하는 화장품처럼 되어버렸다.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는, 또 하나의 계급 의존적 방식이 되었다. 구매한 상품이 단순하고 간소한 물건일 순 있지만 말이다. 단순한 삶처럼 보이는 데는 돈이 많이 든다. ―p. 73~74
두 번째 몸은 우리의 소외된 존재감을 묘사한 표현으로, 개별적 신체로서의 자신과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집단적 원인으로서의 자신을 함께 인식할 때 느껴지는 감각이다. 우리는 평화롭게 보도를 걷고 영화를 감상하고 장을 보는 존재인 동시에 태평양을 떠다니는 오염물과 인도네시아를 덮친 쓰나미의 원인을 제공하는 존재다. 두 번째 몸은 식별되지 않는 불안의 원천이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는 규모의 차이 때문에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그게 우리 잘못임은 붖정할 수 없다. ……음식메뉴를 고를 때나 자동차를 주문할 때, 금속과 실리콘과 벽돌로 마감한 방을 빌리면서 미니멀리스트가 된 기분을 느끼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우리는 맥시멀리즘의 집합체로부터 이득을 얻고 있다. 단순해 보인다고 해서 실제로 단순한 것이 dkselk. 단순함의 미학은 속임수 혹은 감당하기 힘든 과잉을 감추고 있다. ―p. 79~80
비움을 기록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언어로 존재를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글로써 가리킨다면, 그건 곧바로 거기에 존재한다. 당신이 가리킨 것이 텅 빈 바닥일지라도 말이다. 언어는 종종 빈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내용물처럼 보인다. 단어가 많을수록 그 글은 진정성이 덜 느껴진다. ―p. 135
……다양한 비움의 상태는 절대적 통제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암시하며 우리에게 눈앞에 놓인 세상과 직면할 기회를 준다. 미니멀리즘은 우리의 궁극적 자율성을 일깨운다. 그다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예측 불가한 미래다. 그 자유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미니멀리즘은 완전함보다는 판단이 없는 상태, 즉각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영감을 줄 수 있다. “예술은 실제로 존재하기에 유토피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저드가 말했다. ―p. 157~158
“관찰은 우리의 기준일 뿐이다. 도마뱀이 벌레를 보며 품는 생각과 다를 것이 없다. 관찰은 타당성도 없고 객관성도 없기에 이 땅은 아름답지 않다.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땅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p. 163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 도시의 보도를 걷는 사람들의 물결, 피하기 힘든 광고의 시각적 혼돈 등 바깥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기는 훨씬 어렵다. 디지털 공간도 소음으로 가득하기는 마찬가지다. 사무실과 카페에서 앉아 있는 공간은 한적할지 몰라도, 그곳에서 우리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눈에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의 이미지를, 귀에는 스트리밍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머릿속에는 미디어 뉴스와 트위터 피드를 끊임없이 퍼붓는다. 우리의 공간만큼이나 복잡한 우리의 머릿속은 어디나 만연한 소음의 희생양이다. ―p. 174~175
어쩌면 우리는 우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직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안전한 침묵을 만들어내는 것일 수 있다. 침묵이 불러일으키는 경외심이란 더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새로운 형태의 침묵은 초월적 관조가 아니라 상업적 생산성에 골몰한다. ……“침묵으로 인한 공포가 심해진 나머지, 우리는 침묵이 무엇인지 거의 잊어버렸다.” ―p. 188
오제에게 공항은 “비장소”다. 내재된 역사적 기억, 개인의 정체성, 고정적 인간관계 같은 특정 지리적 장소의 일반적 특성이 결핍된, 끊임없이 움직이는 공간이다. 비장소는 기차역, 호텔 로비, 쇼핑몰 등 “통과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을 의미한다. 이러한 비장소는 익명의 공간이지만 최소한의 편안함을 갖추고 있다. ……늘 편안한 이유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딱히 아무 문제도 없기 때문이고, 절대 편안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나 그곳이나 서로 관계를 맺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와이파이 비밀번호만 확인한 뒤 그저 떠다니듯 그곳에 머물 따름이다. ―p. 205~206
우리에게는 웅장한 걸작을 만들어내고자 미리 정해둔 내러티브를 강요받는 대신 예술적 체험에 영향을 주는 기회나 우연을 받아들일 자유가 있다. 미니멀리즘 예술은 작품에 접근하는 통로가 다양할 수도, 아예 통로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식의 여지를 남겨둔다.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만의 체험을 지휘해야 하는 해방적 공간이다. 즉 매순간을 몰두해야 하는 침묵이 주는 자유다. 글자와 유사하게 본다면, 침묵이란 언어가 없는 빈 페이지일 것이다. 비어 있는 자리에는 순수한 잠재력이 있으며, 그건 독자가 정한다. ―p. 217
케이지가 말했듯 “최고의 목적은 목적이 전혀 없는 것이다.” ―p. 233
우리는 삶의 지침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기본적으로 ᄁᆞᆯ린 불가지성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미니멀리즘과 같은 새로운 통제 방식에 관심을 돌려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비현실적이며 영역 없는 지도라는 의심에 물들게 된다. 선불교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문제에 답이 있다는 대전제 자체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이리저리 방법만을 바꿔보며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다. ……무문혜개가 많은 분석 끝에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들면 결국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p. 257~258
미학만으로 구축된 사회는 괴로울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미학이란 오늘날 미니멀리즘이 불러온 열망과 유사하다. 불교가 덧없음을 수용한다고 해서 욕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헤이안 사람들은 덧없음 그 자체에 취향을 결부함으로써 욕망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냈다. 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가장 아름다운 덧없음을 추구했다. 문제는 이 취향이 사악하고 공허한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이다. 사물은 임의대로 드나들고, 판단은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라 그저 변덕에 따를 뿐이다. ―p. 26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