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날씨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무더위도 아니고 기습적인 호우도 아니고 바로 매미의 변화 때문이다. 이번 여름 유난히 길바닥 위로 죽은 매미가 심심찮게 보였던 것. 날아다니는 매미를 땅에서 발견한다는 것도 기이한데, 작년까지만 해도 보지 못한 광경이라 생경하기까지 하다. 뙤약볕을 받아 바싹 메마른 매미를 보며 안타까움이 들었던 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5~6년의 시간을 어둠 속에서 지낸 시간이 덧없을 뿐만 아니라, 표독스런 햇살이 그런 무상함을 더욱 적나라하게 들춰보였기 때문이다.
한때는 도심지역의 밝은 불빛으로 인해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매미울음이 소음공해로 인식되어 사회적으로 문제시된 적이 있다. 원인 제공을 한 건 바로 우리 자신일 텐데 책임주체를 뒤바꾸는 건 참으로 손쉬운 일이다. 그런가 하면 또 언젠가는 꽃매미라는 이종(異種)의 개체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이러한 도시환경의 기현상을 설명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는데, 그 원인이자 결과의 하나로 거론된 것이 생태계 교란이다.
어릴 적 파브르 곤충기에서 읽은 매미는 굼벵이의 모습으로 땅속에서 5~6여년을 견디는 고진감래의 대명사이자, 여름철이 되면 잠자리채를 들고 채집에 나서도 좀처럼 발견하기도 어렵고 찾기도 어렵던 영민한 곤충이었다. 내게 매미는 어디까지나 친숙하고 반가운 존재다. 그런 매미를 한여름 땅바닥에서 사체로 발견하거나 날아오르지 못하고 비틀대는 모습으로 마주하면서 잊고 지내온 동심이 뭉개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루는 해지기 직전 귀가하는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을 비집고 매미 울음소리가 째랑째랑 끼어들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해서 창문 쪽으로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방충망에 매미가 매달려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이 17층. 저층에서 창문가에 내려앉은 매미를 본 적은 있어도, 이런 고층까지 매미가 나타날 연유가 무엇인지는 좀체 헤아려지지도 않는다. 이 또한 매미가 더 높은 곳으로 날갯짓을 해야 할 만큼 어떤 부조리한 사정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곧 땅거미가 지면 방에 불을 켜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불을 켤 수 없었고, 결국 이날은 저녁 내내 불을 켜지 않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첫째는 불을 켜면 낮밤을 혼동한 매미의 활동 패턴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것 같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 뜬금없는 손님이 간밤 내내 우리집 창문가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배려에도 창가의 매미는 밤새 짝을 찾으며 울었다 그쳤다를 반복했는데, 헤아려보자니 그렇게 울기도 열네 번. 하지만 저 아래 공원의 수풀에서 구애 활동을 하는 동족과 영 동떨어진 곳에서 짝을 찾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말이다.
결국 매미는 이른 아침 내가 기상하고 난 직후 열네 번째 울음을 끝으로 휘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꼬박 반나절이었다. 17층에서 혼자 윗배를 당겼다 풀었다 하며 쟁쟁 우는 모습이 청승맞기도 황당하기도 해서 방충망을 툭툭 쳐 날려보낼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혹시나 땅바닥에 말라비틀어져 있던 매미들처럼 끝내 살아남지 못할까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늦여름이 끝나가는 마당에 이미 마무리했어야 할 구애활동을 끝마치지 못한 매미가 외딴 곳에서 울어대는 걸 말리기도 어려운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언젠가 변할 것이다. 본가에 전화를 하며 매미가 17층까지 날아왔더라는 얘기를 하자, 잠시 신기해하시더니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있을 겨를이 어딨냐며 나무라는 답신이 돌아온다. 여름은 언제나 뜨거웠고, 앞으로도 사계절 중 가장 더운 계절일 것이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가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아니다에 대한 논쟁 역시 계속될 것이다. 다만 어떤 변화를 몸으로 느낀다는 것, 그리고 어떤 시간의 흐름을 체험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진실이다.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느끼는 것은 변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보다는 어느새 이만큼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진실, 그리고 그 이면에 도사린 어쩔 수 없는 담담한 슬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