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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4호선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4. 10. 27. 12:08
납덩이 같은 피로함을 느꼈던 하루, 저작권법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간선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목젖이 보일 만큼 고개를 젖히고 잠이 든 줄도 몰랐던 하루, 잠에 취해 있다가도 내려야 할 정류장에 가까워지면 정신이 번쩍 드는 나의 귀소본능은 가끔씩 놀랍기까지 하다. 몇 주간 전 직장의 동기, 군대 동기, 대학 후배까지 평소에 없는 저녁 약속까지 잡고, 심지어는 휴가를 걸어놓고 나와서 일을 하는 나를 보면서,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은 당위(Sollen)를 뒤집어 씌우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어느덧 내 몸은 이런 당위를 견디지 못하고 종종 깊은 휴면에 빠진다.
시청 앞에서 남대문 시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가을치고는 따듯한 햇살이 충일했다. 오래된 카메라 가게들과, 이곳의 명물이 된 호떡집을 지나 내가 향하는 곳은 안경점. 콧등에서 흘러내리는 안경을 단단히 고정하고 싶어 몇 개월 전부터 벼르고 별러 왔던 것을, 가까스로 안경점을 찾았건만 어찌된 일인지 대기석에는 사람이 가득했고, 앳된 남자직원은 최대한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른 곳에서 용무를 보다 올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내가 남대문 시장에 온 용무는 안경에 관한 것 하나뿐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빈손으로 가게를 나서는 동안 남대문 시장에 뒤엉킨 인파가 야속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기묘한 추억이 나를 덮쳤다. 종합야구장이 남아 있을 당시 동대문 시장의 풍경이 남대문 시장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 손님이 고를 수 있도록 배려된 진열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빼곡히 쌓아올린 싸구려 물건들, 짝퉁들, 사람들의 걸음을 늦추는 길거리 음식들. 인삼가게, 김가게, 군복가게,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던 상품들. 간판의 가타카나와 간체자, 촌스러온 알파벳 폰트, 경쟁적으로 알록달록한 간판들. 남대문 시장을 찾은 외국인은 물론이거니와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내 내면에 층화되어 있던 오래된 화석을 손에 쥐고 지나온 경로를 되짚는 기분으로 회현역으로 가는 방향을 찾는다.
혜화역 2번 출구에는 며칠 전 왔을 때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간병보호인의 복지를 위한 캠페인 광고가 버스정류소에 걸려 있다. 나는 왜 항상 대학로를 잊고 지내는 것일까, 나의 무심함을 탓하며 마로니에 공원의 가을 정취에 빠져들었지만, 원래의 목적대로 연극을 보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 나머지 허탈하게 계단에 앉았다. 공원을 에워싼 빨간 벽돌의 정방형 건물들은 포틀랜드에서 보았던 풍경을 떠올리게 하고, 서울에서 이런 분위기를 가진 곳이 또 있을까 생각하며 나의 20대 때보다 더 고즈넉해진 대학로를 누비는 20대의 청춘들을 마치 다른 차원에 속한 것처럼 바라본다.
공원 가장자리에서 뒤늦게 노랗게 물이 들어가는 은행나무의 꼭대기, 그 위로 뉘엿뉘엿 쏟아지는 햇살에 눈길을 던지고 있던 순간, 내 왼쪽으로 커다란 고함이 들려왔다. 미간에 주름이 깊이 패인 초로의 아저씨가 통기타를 들고 버스킹을 시작하는데, 청중을 사로잡는 언변과 유머가 웬만한 범인은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다. 벽돌 건물의 높은 외벽에서 시작된 공연은 어느 정도 사람을 끌어모으자, 계단에 면한 공원의 편평한 위치로 내려와 공연을 이어가는데, 그 사이에 놓치는 관객이 한 명도 없다. 30년 넘게 이곳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다는 이 유쾌한 인물을 보며, 어쩐지 파리의 지하철 통로에서 색소폰을 외롭게 연주하던 남자가 떠오른다. 다섯 곡쯤 들었을까, 뜻밖의 사건에 기분이 전환된 나는 기타케이스에 오천 원을 넣었다. 그리고 마로니에 공원을 한 바퀴 돌며 빠져나오는데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이라는 빛바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주제 없는 글 > Miscellaneo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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