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두 입장만이 가능하다며 부시가 제안하는 이분법―“당신이 우리 편이 아니라면 테러리스트의 편이다!”―은, 둘 다를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고, 반대 입장의 틀을 형성하는 조건을 의문시한다. 더구나 그것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구분으로 우리를 회귀시키고 그러한 감상적 환유(metonymy) 속에서 “문명”과 “야만”이라는 불쾌한 구분으로 우리를 회귀시키는 것과 똑같은 이분법이다. ―p.23~24
우리는 마치 궁극적인 목적이 정확한 조준이기라도 하듯, 더 잘 조준하지 못한 것을 자책한다. …우리 자신의 행위는 테러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9‧11 사건으로 이어지는 적절한 선역사(先歷史)가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하기 시작하고, 어떻게 사태가 여기까지 왔는가를 묻는다면, 행위주체성의 문제를 벌써 복잡하게 만들게 되고 그것은 틀림없이 도덕적모호성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p.28~29
테러리즘의 조건은 필요조건이거나 충분조건일 수 있다. 필요조건이라면 그것은 테러리즘이 정착하려면 없어서는 안 될 정세, 테러리즘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정세를 말한다. 충분조건이라면, 그것의 존재만으로 테러리즘이 발생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조건이 행위주체 개인처럼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주체가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채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p.34~35
폭력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은 물론 그 행위에 책임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개인은 만들어진 존재이고, 그들의 행위를 순전히 자생적 의지의 행위나 개인의 병리, “악”의 증상으로 환원하는 것은 오류이다. …우리의 행위는 자생적인 것이 아니고 조건의 제약을 받는다. 우리는 행위를 당하기도 하고 행위를 하기도 하며, 우리의 “책임”은 그 두 상황의 접점에 놓여 있다. ―p.40~41
애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듯, 뭔가를 잃는다는 경험이 있는가 하면 또 상실이 초래하는 변화라는 결과가 있다. 후자는 그려질 수도 계획될 수도 없다. …우리의 의식적인 계획, 우리 나름의 기획, 우리 자신의 앎과 선택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만약 애도가 무엇을 상실했는지에 대한 앎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애도는 상실의 불가사의한 차원,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의 상실이 유발하는 알지 못함의 경험에 의해 유지될 것이다. ―p.48~49
수많은 정치적 운동에 본질적인 것은 육체의 온전함과 자기결정에 대한 권리 요청이다. 우리의 몸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것이며, 우리가 몸에 대한 자율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주장은 중요하다. ―p.54
우리는 처음부터 타인에게 맡겨진 존재이며, 심지어 개체화되기 이전부터 육체적인 요구조건 때문에 일단의 일차적 타인에게 내맡겨진 존재이다. ―p.62
비실재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가해진다면, 폭력의 관점에서 볼 때 폭력은 그 사람들의 삶을 해치거나 부정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이 이미 부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상하게도 살아 남아 있기에 다시 부정되어야 한다. 그들은 언제나 이미 상실된 상태이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했던” 적이 없기에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죽어 있음의 상태로 끈질기게 계속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므로 죽여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p.65
탈인간화의 담론이 작용한다기보다는 담론의 거부가 그 결과로서 탈인간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p.68
만약 취약성이 인간화의 한 가지 전제조건이라면, 그리고 인간화가 인정의 다양한 규범을 통해서 상이하게 이루어진다면, 결과적으로 취약성이 모든 인간 주체에게 배분되기 위해서 취약성의 인정은 근본적으로 기존의 규범에 의존하게 된다. ―p.77
책임감의 문제는 타자로부터 고립된 채로 나 혼자서 사유할 수 없다. 책임감을 나 혼자 사유한다면, 애당초 책임감이라는 문제의 틀이 되는 관계의 구속으로부터 나를 떼어내 버린 셈이다. ―p.81
내가 “우리”를 소환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너는 이 방향감각의 혼란과 상실을 통해서 내가 얻게 되는 결과이다. ―p.86
통치성은 신체와 사람들의 관리와 통제, 사람과 인구집단의 생산과 규제, 그리고 인구집단의 삶을 유지하고 제한하는 한에서 재화의 유통에 관여하는 권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통치성은 정책과 부서를 통해, 관리제도 및 관료주의적 제도들을 통해, 그리고 법을 통해 작동하고, 또 여러 형태의 국가 권력을 통해 작동하지만 국가 권력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p.90
우리가 과거라고 생각했던 역사적 시기가, 역사가 연대기적이라는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면서 집요하게 현재의 장을 구조화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법의 유예는 명백히 통치성의 전술로 해석할 수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이 맥락에서 주권의 부활을 위한 여지를 만들기도 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국가는 법을 유예하는 이 행위로써 어느 정도는 국가라는 장치 바깥에 존재하는 일단의 행정권력들로 분절된다. ―p.92~94
“주권적 결정은 ‘법을 만들기 위해 자신은 법이 필요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국가가 법을 무효화하는 행위는 주권적 권력의 작용으로, 아니면 오히려 무법적인 주권적 권력이 생겨나거나 혹은 사실상 새로운 형태로 다시 등장하게 되는 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국가 권력은 법적으로 행사되어도 다 소진되지 않는다. …국가는 예외상태를 지정하고 그로써 법의 적용을 선별적으로 철회할 때 국가의 초법적 지위를 드러낸다. 그 결과는 법의 이름으로 통용되는 준법적 세계이다. ―p.100~101
그들의 행위는 명백히 조건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최종적이고 심사나 항소의 대상도 아니라는 점에서 무조건적인 심판이다. …이런 경우에 드러나는 주권은 통치성 안에서 자신의 기반을 은폐하지만, 그것은 바로 관료의 행위주체성을 통해서 드러나므로 통치성의 장 안에 있는 것이다. …주권적 권력이 법치를 유예하는 것이 아니라, 법치가 유예되면서 그 행위와 효과로서 주권을 생산하는 것이다. ―p.105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는 국가중심이 아닌 정치체가 저지르는 특정한 형태의 폭력을 격하하는 작용을 하는 동시에 확립된 국가들의 폭력적 대응을 용인한다. ―p.133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제한된, 또 제한을 가하는 문화적 틀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용어를 기각할 이유가 아니라 그 용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것이 배제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때로 어떤 가능성을 열어주는지를 물어야 하는 이유이다. …분노와 이해불가의 순간, 즉 우리가 이해하는 인간 공동체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보편적 권리로서 인권을 시행하는지 여부가 바로 우리의 인간다움에 대한 시금석이다. ―p.135
<통치성>에서 푸코는, 인구집단, 재화, 경제적 사안의 관리와 계발을 과제로 삼는 통치의 기술을, 그가 주장하기로는 재화 및 사람의 관리와는 전통적으로 별개의 것이면서 무엇보다도 공국(principality)과 영토의 보존에 관여하는 주권의 문제와 구별하고 있다. …통치성은 법이 일단의 전술임을 폭로하는 만큼 주권을 교란하는 작용을 하는 듯 보일 것이다. 반면에 주권은 법의 토대를 제공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자기정초적 권력을 과시하거나 행사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가시적 목표를 갖지 않는다. ―p.139~141
결과상의 반유대주의란 세상에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발언들을 암묵적으로나 명시적으로 의도된 반유대주의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청자와 독자만 있다고 상상해야만 이해하 수 있을 것이다. 결과상의 반유대주의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의도적인 반유대주의를 전제하는 것이다. ―p.155
반유대주의라는 호명이 위협 속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정작 그러한 비난이 이루어져야 할 경우에 그 비난은 힘을 잃게 될 것… 실제로 대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을 옹호하기 위해서 반유대주의라는 비난이 사용된다면, 유대인을 모독하고 차별하는 사람들, 유럽에 있는 유대교회당에 폭력을 가하고 나치 깃발을 흔들며 반유대주의 단체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규탄하는 그 비난의 힘은 근본적으로 희석된다. ―p.160~161
주류 언론은 중동에 관한 입장이 두 가지밖에 없고 그 두 가지가 “친이스라엘” 입장과 “친팔레스타인” 입장이라는 용어로 적절히 기술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너무나 많은 중요한 구분을 간과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의 입장이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고 단언하는 전제는 이 입장들이 별개의 관점이고 내적으로 동질적이며 중첩되는 지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너무나 많은 정치적 신념의 복합적 형식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p.176~177
이런 위협(반유대주의)은 말할 수 있는 것에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공적 영역을 규정하는 한계를 결정한다. 달리 말하면, 공적 담론의 세계가 바로 그러한 비판적 관점을 배제하는 시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비판의 배제는 결과적으로 공공성/대중 자체의 경계를 설정할 것이고, 공공성/대중은 명백하고 불법적인 폭력에 직면해도 비판적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할 것이다. ―p.183
내가 생각하기에 부재하는 것, 귀환해야 하는 것은 말걸기의 구조에 대한 고려이다. …이 말걸기에 대응하는 것은 이 시기에 매우 중요한 의무인 것 같았다. 이 의무는 저자-주체의 복권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말걸기의 대상이 된 데 뒤따르는 대응의 양상에 관한 것이다. 즉, 타자가 나에게 뭔가 요구하고, 어떤 실패에 대해 나를 비판하고, 또 어떤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 후에 비로소 타자에게 취하게 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p.187
우리를 도덕적으로 구속하는 것은 타인이 어떻게 우리가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지와 상관이 있다. ―p.188
“얼굴에 대한 접근은 가장 기본적인 양태의 책임감이다…. 얼굴은 내 앞에(en face de moi) 있지 않고, 내 위에 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타자로, 죽음을 꿰뚫어보며 죽음을 드러낸다. 둘째로 얼굴은 혼자 죽지 않게 해달라고 나에게 요청하는 타자이다. 마치 그를 혼자 죽게 하면 그의 죽음에 공범이 되기라도 하듯이. 그래서 얼굴은 나에게 말한다. 살인하지 말지어다.“ ―p.190
얼굴에 대응하는 일, 얼굴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다른 삶 속의 위태로운 그 무엇, 혹은 오히려 삶 자체의 위태로움에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 자신의 삶에 깨어 있다는 의미일 수 없고, 그러므로 나 자신의 위태로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위태로운 삶에 대한 이해를 추론한다는 의미일 수 없다. 그것은 타자의 위태로움에 대한 이해여야 한다. ―p.194
”자기의 죽음도 두려웠지만 자신이 죽여야 할지도 모르기에 불안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두려움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를 해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 이 두 가지 충동이 형제간의 싸움처럼 서로 부딪친다. …비폭력은 평화로운 곳에서 유래하지 않고, 오히려 폭력을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폭력을 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이의 항구적 긴장에서 유래한다. ―p.197
말걸기의 대상이 되고, 이름을 부여받고, 일련의 주어진 부담들을 떠안은 채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타자성에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는 이미 어떤 폭력이 있다. 말걸기의 대상이 되는 조건을 스스로 통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걸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애당초 의지를 박탈당하는 것이며 그 박탈을 우리가 담론 안에 처하는 상황의 기반으로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p.200
인간적인 것은 재현과 동일하지 않고, 재현불가능한 것과도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성공적으로 실천된 그 어떤 재현에도 한계로 작용하는 것이다. 얼굴은 재현의 이러한 실패로 인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가능성에서 구성된다. ―p.207
애도불가능한 삶을 희생시키는 폭력과 그 삶의 공적 애도가능성에 대한 금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상실의 탈실재화―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무감각함―는 탈인간화를 실행하는 기제가 된다. 이 탈실재화가 일어나는 곳은 이미지의 바깥도 안도 아닌, 바로 그 이미지를 담는 틀이다.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