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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남겨진 연인들일상/film 2025. 12. 28. 12:03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판타지, 로맨스/짐 자무쉬/이브(틸다 스윈튼), 아담(톰 히들스턴)/123 "I just feel like all the sand is at the bottom of the hour glass or something."
"When you separate an entwined particle and you move both parts away from the other, even at opposite ends of the universe, if you alter or affect one, the other will be identically altered or affected."

Pera Museum 채도가 낮은 색감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이 영화의 경우 탁한 색깔들이 잘 어우러지도록 화면을 구성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좀비물이든 뱀파이어물이든 판타지 장르를 즐겨보는 편이 아닌데, 드문드문 이어지는 대화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아 골똘히 화면을 뜯어보게 되는 영화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OST가 내게는 굉장히 생소한—아랍적 선율과 일렉 기타의 음색이 합쳐진—스타일이었음에도 단번에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영화의 공간 배경이 되는 미국 디트로이트와 모로코 탕헤르라는 도시에 관한 부분이었다. 애시당초 뱀파이어라는 설정으로 인해 이 커플—아담과 이브—에게 물리적인 거리는 큰 의미가 없다 해도, 어쩌다가 이 두 도시가 영화 속 배경으로 채택된 것일까. 폐건물이 우중충하게 늘어선 디트로이트의 밤거리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하는 뱀파이어(아담)에겐 안성맞춤으로 보이지만, 카스바의 골목이 얼기설기 뻗은 탕헤르는 뱀파이어(이브)가 자리잡기에는 도저히 적당한 공간으로 보이진 않는다. 뱀파이어물이 서구에서 유래돼 주로 서구권에서 소구되는 걸 감안할 때 마그레브 땅 끝자락에 자리한 도시를 구성요소로 끼워넣은 건 더욱 모험을 건 선택으로 느껴졌다.
탕헤르에서 디트로이트로, 디트로이트에서 탕헤르로 이동하는 동선 속에서 아담과 이브의 대화에는 런던을 경유지로 할지, 마드리드를 경유지로 할지에서부터 시작해 유럽의 극작가와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조지 고든 바이런,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 영국 극작가에 대한 회상이 주를 이루고,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슈베르트에게 몇 백 년 전 영감을 주었던 일화도 거론된다. 프랑스어로 적힌 ‘천일야화(Café mille et une nuit)’라는 카페 간판이라든가 이안에게 신선한 피를 공급해주는 무명의 프랑스 의사 이야기에는 모로코와 프랑스의 굴곡진 근대사가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요컨대 미국과 북아프리카라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참 동떨어진 이 두 지역은 영화가 나온 2013년으로부터 족히 2세기는 더 된 유럽이라는 시대와 공간을 통해 연결된다.
영화 후반부 청중들 사이에서 부르는 신묘하면서도 고혹적으로 노래를 뽑아내는 야스민 함단이라는 레바논 여가수, 카스바의 골목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벤치에서 무아지경이 되어 춤을 추듯 서로를 감싸는 남녀, 이에 군침을 흘리며 표독스런 표정으로 다가가는 아담과 이브. 뱀파이어 일행이 바에 둘러앉아 밴드 음악을 한없이 진중하게 지켜보는 장면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강렬한 일렉 기타 음에서 모로코 전통악기(우드, Oud)에 이르기까지 실험적이고 이색적인 소재들을 뱀파이어 커플을 구심점으로 화면이라는 이차원 공간에 담아내면서도 그 평면을 뛰어넘는 뜻밖의 아우라를 선사한 영화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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