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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거북 / 마이클 뒤독 더빗 / 81>
정말 완벽한 영상이었다. 게의 재빠른 걸음걸이에서부터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이의 걸음걸이까지 완벽히 구현했다. 단 하나의 대사도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맨 처음 붉은 거북이 등장하는 순간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이야기만 놓고 보면 정말 알쏭달쏭하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인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인가? '인간 대 자연'의 구도를 다룬 것인가? 고전적인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인가?
영화에는 등장인물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된다. 거북의 등딱지를 닮은 무인도에 조난된 남자. 붉은 거북에서 승화된 여성. 섬을 쑥대밭으로 만든 해일(海溢). 아버지가 꿈꿨던 문명을 향해 떠난 아들.
# 아담과 이브?
영화가 제공하는 배경만 놓고 보면 무인도는 영락 없는 에덴 동산이다. 쏟아질 것 같이 하늘을 가득 메운 별. 공중을 표류하는 갈매기 떼. 동양적인 느낌의 대나무 숲.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설화로 보기 어려운 결정적 부분은 남자가 붉은 거북을 사실상 죽이는 장면. 여성이 남성의 갈빗대에서 만들어졌고, 여성의 그릇된 호기심 때문에 남성이 선악과를 삼켰다는 기존의 모티브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남자가 보름달을 바라본 후 숨을 거두자, 원래의 붉은 거북으로 체현된 여성이 넓은 바다로 회귀하는 마지막 장면은 또 다른 물음표를 떠올리게 한다. 여성의 무한한 포용력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 카인과 아벨?
말라버린 붉은 거북의 균열(龜裂)에서 남자가 장래의 부인으로 맞이하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묘하게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떠올리게 한다. 아무래도 남자가 무인도에서 처음으로 저지른 살생이었고, 그 대상이 붉은 거북―물론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아귀가 꼭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라서 충분한 설명은 안 될 것 같다.
# 자연 대 인간?
<자연 대 인간>은 이 애니메이션이 확실히 모티브로 삼고 있는 소재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즐겨 삼는 주제이기도 하다. 극중에서 여자가 붉은 거북의 딱지를 바다에 띄워보내자, 남자도 뒤따라 한창 만들고 있던 뗏목을 바다에 떠나 보낸다. 남자가 문명에 대한 미련을 접는 이 장면은, 마치 자연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한 노자의 가르침마저 떠오르게 했다. 한편으로는 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한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빈 코르크병'을 장난감 삼아 놀던 남자의 아들은 결국 무인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 로빈슨 크루소?
충분히 이런 맥락에서 읽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로빈슨 크루소>에 나오는 로빈슨 크루소의 친구 '프라이데이(Friday)'는 아마도 남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꽃게 무리가 아닐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마 할아범의 거처에 출몰하는 숯검댕이(まっくろくろすけ)처럼, 귀염둥이 꽃게 무리는 단연 지브리 스튜디오의 손길이 느껴지는 소재였다. 다만 <로빈슨 크루소>와의 차이점이라면 무인도 탈출이라는 과업을 아버지가 아닌 아들이 시도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문명세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는지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등등..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았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떠올랐던 질문은 "태초의 인간이 어떻게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하는 점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 등장인물들이 하는 대사라고 해봐야 고작 고함을 치거나 흐느끼는 것 정도다. 그 외에는 어떤 인공적인 단어도 튀어나오지 않는다. 원시의 인간은 아마 '말'을 할 줄 몰랐을 것이다. 그랬던 인간은 '말'이라는 '무기'로 세계를 호령하기 시작했다. '말'은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무기였던 듯 싶다. 석기보다도. 청동기보다도. 그리고 철기보다도... 참 오묘한 일이다. 워낙 오랜만에 무성영화를 보다 보니 더욱 '말소리'에 대한 생경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 길지 않은 러닝타임이지만, 아름다운 영상과 더불어 꽉찬 스토리를 담은 애니메이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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