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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기다려/드라마/마리-카스티유 멍시옹-샤르(Marie-Castille Mention-Schaar)/노에미 메를랑(소니아), 나오미 아마제르(멜라니)/105>
요즈음 볼 만한 영화가 많지 않아서 이것저것 물색하다가, 아예 색다른 영화를 보기로 했다. 프랑코포니 영화제에서 상영중인 작품 가운데 IMDb에서 평점이 괜찮은 영화를 고르다 낙찰된 것이 <하늘이 기다려>. 원제는 <Le ciel attendra>다. 프랑스어 "Ciel"은 우리말로 '하늘'인데 영어제목의 경우 특이하게 <Heaven will wait>라고 번역해서 '하늘'이라는 뜻의 'Sky'보다 종교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통 '하늘(天)'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러니까 가령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라고 표현할 때 '하늘'은 '종교적'의미라기보다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뜻한다. 그에 비해 이 영화에서 사용되는 하늘(Le ciel이든 Heaven)은 기본적으로 종교적 의미를 지닌, 그러니까 쉽게 말해 '천국'을 뜻한다.
이 영화는 최근 개봉한 또 다른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바로 <나의 딸, 나의 누나>이다. (나는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 작년 말에 <카우보이(Les Cowboys)>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를 관람했었다) 두 영화 모두 유럽의 평범한 청소년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지하디스트가 되어가는지를 보여준다.
<하늘이 기다려>의 경우, 두 개의 에피소드가 번갈아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소니아"의 에피소드는 「지하디스트→평범한 청소년」의 과정을 다루는 반면 "멜라니"의 에피소드는 「평범한 청소년→지하디스트」의 과정을 다룬다. 그런데 이 두 이야기는 묘하게 겹친다. 바로 "소니아"와 "멜라니" 모두 지하디스트를 꿈꾸던 무슬림 자매지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둘은 함께 시리아 행을 결심하지만, "소니아"는 실패하고 "멜라니"만이 성공한다. 그리고 프랑스에 남은 "소니아"는 어렵사리 일상으로 복귀한다.
이 영화는 IS가 SNS를 통해 유럽의 청소년들을 어떻게 조종하는지를 굉장히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상반되는 두 이야기를 비교시킴으로써 지하드에 참여하는 유럽 청소년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녀들이 보이는 '무슬림'에 대한 병적 집착을 지켜보며 일종의 "정신적 질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일종의 "정신적 유괴"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만큼 IS의 접근은 교묘하고 집요하다. 일단 거미줄에 걸린 청소년은 거미(IS)로부터 헤어나올 수 없는 착란 상태에 빠진다.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자밀라(左)"와 "멜라니(右)"
자밀라는 자기보다 의식과 절차를 깐깐하게 지키는 멜라니를 보며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두 에피소드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 '상담자' 또는 '중재자'―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연기는 Ariane Ascaride가 맡았다)―다. 상담자이자 중재자(이하 중재자)는 지하디스트를 꿈꾸는 청소년과 그 가족들에게 건네는 진심어린 조언을 제공한다. 중재자는 그녀 본인이 무슬림이면서 지하디스트를 자처하는 학생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시한다. 즉 이슬람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인물이다.
언뜻 영화를 봐서는 자칫 「가톨릭 : 이슬람 = 선 : 악」이라는 구도가 머릿속에 잡힐 수 있다. 그러나 중재자는 일반적 신앙으로써의 이슬람과 IS(극단주의 이슬람 무장세력)가 어떠한 차이를 지니는지를 이성적으로 증명한다. 이슬람 그 자체는 급진적이거나 폭력적인 종교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달려 있다는 것. 오히려 '정상적인' 무슬림들들은 일반적인 기독교도들만큼 세속적인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그릇된' 무슬림들이 성전(Jihad)을 통한 무력 행사를 강조하고, 종교적 관용성을 배척(排斥)한다.
집단상담에 참여한 "소니아의 엄마(左)", "소니아(中)", 그리고 "멜라니의 엄마(右)"
흐느끼며 과거를 회상하는 소니아를 지켜보며 두 여성은 이내 손을 맞잡는다
"이슬람은 종교이지 게임이나 유행이 아니야! 너의 종교방식은 알라조차도 바라지 않을 걸."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다. "멜라니"의 무슬림 친구 "자밀라"가 "멜라니"에게 건넨 말이다. 무슬림인 자신조차 따르지 않는 온갖 의식과 절차에 사로잡혀 의미를 부여하는 "멜라니"를 보며 "자밀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 문제는 유럽의 청소년들에게 지하디스트에 가담하는 것이 하나의 게임이나 유행처럼 진행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게임은 너무 진지하게 한다는 것. 호기심에 발을 담근 청소년들은 어느새 발을 뺄 수 없는 깊숙한 게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아이들의 두려움을 잘 관리해야만 합니다"
"중재자"가 문제청소년들의 가족구성원에게 건넨 조언이다. IS가 이용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보다 기괴하고 엽기적이고 잔학한 수단을 동원하여 두려움을 극대화한다. 정신적으로 취약한 청소년들은 이러한 두려움에 쉽게 이끌린다.
그렇다면 왜 하필 유럽의 청소년들인가? 또 하필이면 프랑스인가?
개인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믿는다는 점에서 공통된 맥락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배경의 사회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뾰족한 수를 발견하지도 못한 유럽의 청소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교로 쉽게 전도(轉倒)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유럽 지역은 IS가 득세하는 중동에 아시아보다 지리적으로 가깝다. 특히나 '프랑스'는 유럽 내에서 비기독교 인구가 많은 국가 중의 하나이자,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반면에 동아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종교가 있다. 하지만 "유교"나 "불교"는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라기보다는 "수신(修身)"의 성격이 강하다. 또한 동아시아는 유럽보다 지리적으로도 중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상대적으로 IS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까닭이다. 어찌됐든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급격하게 그릇된 방향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영화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웨스터민스터 국회의사당에서 테러에 대한 후속조치를 취하는 영국경찰들
최근 런던 국회의사당 테러를 통해 IS는 다시 한 번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들은 잊을 만하면 두려움의 씨앗을 심는다. 언제나 두려움이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극단적 수단을 통해 일깨워준다. 도대체 언제까지 '소프트 타깃'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IS에 자행될지 의문이다. 한편 런던테러 사건 이후, 용감하게 구조 활동에 나선 시민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안타까움과 놀라움이 더해지고 있다.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IS의 등장으로 인해 중동지역의 살상은 조명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런던 테러가 일어난 같은 날, 이라크 모술에서는 똑같은 IS의 공격으로 인해 민간인 100여명이 한순간에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후 미군의 오폭에 의해 발생한 사건임이 밝혀졌다) 모든 생명의 무게가 같다고 한다면 모든 죽음의 무게 또한 같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각국은 런던 테러에 대해서는 애도를 표하면서도 모술에서 벌어진 공격에 대해서는 거의 눈길조차 던지지 않고 있다. 작년 파리 테러 때와 같은 패턴이다. 살상의 경중을 떠나, 극단 무장세력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유럽과 중동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할 테지만, 강력한 미디어를 지닌 서구(西歐)는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점하는 데 우위를 보이고 있다.
9.11 테러가 발생한지도 16년째.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테러에 때문에 무고한 시민들이 불안에 떨어온 기간도 어느덧 16년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책은 오리무중인 듯하다. 영화를 보며,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신앙'이 물리적으로 얼마나 가공할만한 '폭력'으로 변용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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