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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에서 새벽까지(Dusk to Dawn)일상/film 2017. 6. 7. 00:51
<세헤라자데, 내게 말해줘(إحكي يا شهرزاد)/드라마/유스리 나스랄라/헤바(모나 자키), 카림(하산 엘 라닷드)/125>
「황혼에서 새벽까지」. 여주인공―또한 방송인이기도 한―'헤바'가 극중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이름이다. 주로 정치적 사안을 다뤄오던 그녀는, 승진을 앞둔 남편 '카림'의 요청에 따라 방송에서 정치적인 이슈를 가급적 다루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새로이 편성된 테마가 「황혼에서 새벽까지」다. 원래는 시시콜콜한 가십을 다루려던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여성 게스트들을 접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황혼에서 새벽까지」라는 의미심장한 프로그램의 이름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집트의 여성이―더 나아가 여성 모두가―맞이할 여명(黎明)을 암시하는 듯하다.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헤바'
WHO is SCHEHERAZADE?
영화는 어느 악몽과 함께 시작한다. 그 꿈의 주인은 '헤바'. 그녀는 도무지 문을 찾을 수 없는 방에 갇혀서 헤매던 중 잠에서 깨어난다.
그녀가 영화에서 맡은 역할은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이다. '천일야화'는 우리가 흔히 '아라비안 나이트'라고도 하는 아랍세계의 구전설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세헤라자데는 이 천일야화를 술탄하게 들려주는 페르시아 왕비의 이름이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세헤라자데'라고 하면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이 먼저 떠오른다'ㅁ') 여하간 헤바는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세헤라자데로서, 여러 여성들의 사연들―극중에는 총 세 개의 사연이 소개된다―을 소개하는 전달자이자 중개자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는 그녀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화자(話者)로서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제목이 <세헤라자데, 내게 말해줘(Scheherazade, tell me a story)>인 것이다.
사랑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아마니'
Story of AMANY
첫 초대 손님은 '아마니'라는 인물이다. 현재 50대에 접어든 그녀는 자신이 비혼(非婚)을 택한 것에 후회가 없음을 공개적으로 말한다. (영화가 2009년에 개봉한 걸 감안하면 상당히 현대적인 캐릭터다.) 보수적인 이집트 사회에서 50이 넘도록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무슨 중대한 결함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어린 눈초리를 받기도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그녀는 단호히 말한다. 그녀 또한 젊은 시절 평범한 연애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가 만났던 남성은 매우 가부장적이고, 허영심 많고, 권위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여성의 얼굴을 가리는 베일은 천으로 만들어 있지만, 여성의 머리(지성)를 가리는 베일은 철로 만들어져 있다." 이집트에서 여성의 지위가 일상생활면에서나 사회진출면에서나 낮은 위치에 놓여 있음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대목이다.우월적인 지위를 갖게 된 부하직원 '사이드(Saïd)'는 어느 순간 천하의 바람둥이 '돈 주앙'이 된다
Story of SAFAA
두 번째 이야기는 어느 세 자매의 이야기다. 이중 맏언니인 '사파'가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출연한다. 물려받은 유산(인테리어 가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게 된 세 자매는, 어린 시절부터 가게일을 도맡아온 부하직원 '사이드'에게 점점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사이드는 이러한 입지 변화를 활용하여 세 자매를 기만하고 우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명예에 민감한 아랍사회에서 한 명의 남성이 세 명의 여성을 동시에 희롱했다는 사실은, 세 자매―특히 맏언니인 사파―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감과 상처를 안긴다. 사실 두 번째 스토리는 '젠더'의 관점에서 주제가 모호하다고 생각한다. 세 자매 역시 사이드를 성적 도구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탐닉하는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기 때문이다.우리나라 포스터는 이 사진을 쓰고 있어서, 이 두 인물이 주인공인 줄 알았다
Story of NAHED
이에 반해 세 번째 스토리는 문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주인공 남성이 여성을 철저히 성적 도구―나아가 가장 손쉬운 유린대상―로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체가 남성의 패권 아래 놓여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인 여성은 처벌을 호소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아드함(남자주인공)'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사회적 실추를 오롯이 떠안게 될 '나헤드(여자주인공)'를 향해 코웃음을 치는 비열한 인물이다. 유학을 다녀온 저명한 경제학자, 컨설팅업체의 고문 등등 사회적 옹벽을 겹겹이 치고 있는 아드함에게 나헤드의 외침은 한낱 연약한 화살에 불과하다. 결국 피해 사실을 알리고자 나헤드는 합법적인 1인 시위를 벌이지만, 십수 명의 전투경찰에게 에워싸이고 만다. 이는 그녀가 처한 사회적 입지를 단적으로 나타낸다.술탄과 세헤라자데
상처받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저 제3자의 입장에서 전달하기만 하던 헤바는, 종국에 자신 역시 약자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스토리텔러에서 사연의 주인공으로 처지가 뒤바뀐다. 그리고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전면에 등장한다.
영화는 방송국의 세트장을 에워싼 검은 장막에서 환한 빛이 넘치는 흰 바탕으로 화면이 전환되면서 끝을 맺는다. 과연 헤바는 아랍사회에서 여성으로서, 방송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맡을까. 카림의 요청에 따라 정치적 이슈에서 발을 빼려던 그녀는, 결국 '젠더'라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발을 담갔다. 과연 우리의 세헤라자데는 악몽에서 빠져나올 문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나 자신에게도 질문을 건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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