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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즙(搾汁)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7. 6. 12. 03:36
뿌리가 퍽퍽한 토양으로부터 희박한 수분을 빨아들인다.
뿌리는 물을 찾아 가녀린 잔뿌리로 처절하게 흙을 더듬고 있겠지.
줄기를 지탱해야 할 이랑의 흙더미는 메마른 먼지가 되어 흩어진지 오래된 듯,
식물의 밑동은 건조한 열기에 맨몸을 휑하니 드러낸 채로 줄기라는 것을 떠받친다.
그나마 땅위로 솟아나온 줄기는 거꾸로 서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볼품없이 뻗어 있다.
듬성듬성 가지에 남은 잎사귀들―남은 잎사귀보다 떨어진 잎사귀가 더 많은데 이랑의 흙더미와 마찬가지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빛바랜 누런 색을 띠고 있다.광합성은 제대로 할는지 이 식물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채 여물지는 않았으되 야윈 열매들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완연히 무르익은 색깔도 아니고 알도 크지 않지만 분명 열매는 열매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이 앙상한 식물이 묘하게도 시선을 잡아끈다.
그리고 열매를 쥐어짜서 먹어 헤치워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달콤함이 덜할지언정 배를 채우기에는 모자랄지언정 저 열매의 시큼한 즙이라도 좋으니 내 어금니로 쥐어짜서 그 존재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
열매가 만족스러울지 그렇지 않을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열매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을 뿐.
그리고 집어삼키고 싶었을 뿐.
되돌아보건대, 아마도 나는 그렇게 사소한 착즙을 하며 내 젊음을 근근이 버텨왔었나보다.
그중 대개는 시큼하고 떫은 열매들이었다.
물론 아주 잠깐 단맛이 도는 열매들도 있었지만 이는 극히 드물었다.
무엇보다 단 하나의 열매를 맛보고자 마음속에 식물 하나를 틔우고 기르는 것은 참 고단한 일이었다.
물론 누군가는 그 열매를 비웃을지 모른다.
허나 단연코 버릴 것 없는 것들이었다.
때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의 착즙은 계속되어야겠지만, 원래부터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던가?
내 시선을 사로잡은 식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자꾸만 이 볼품없는 식물이 얄궂게 느껴지는 것이다.
볼썽사납더라도 거꾸러진 모양이라도 이 식물을 눈앞에 두고 싶은데, 동시에 왜 이리도 매정한 마음이 샘솟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참 슬프다, 분명 열매를 주었던 존재인데 이 가시없는 존재가 왜 이토록 내 마음을 난도질하는지..'주제 없는 글 > Miscellaneo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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