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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인연(因緣)여행/2017 늦봄 제천-원주 2017. 6. 13. 00:57
인천 시도(矢島)에서..
인연이란 게 뭘까.
원해서, 또는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여러 사람들을 만나 왔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록 경외(敬畏)로운 존재다.
때로는 숭고(崇高)함에 놀라고, 때로는 조악(粗惡)함에 놀란다.
원주에서 산행을 마친 날, 저녁에 서울로 돌아와 J와 서울의 정동 일대를 구경했다.
마침 덕수궁이 야간개방을 하는 날이라 천천히 궁궐의 밤풍경을 즐겼다.
그리고 이후로도 또 다시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는 인천의 영종도에 달린 외딴 섬이었다.
신시모도라고도 줄여 부르는 이 지역에서, 비록 치악산의 날씨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지만, 한껏 라이딩을 즐겼다.
아무런 관광객도 없는 자유로운 라이딩이었다.
J는 인도 아그라의 시칸드라에서 만났다.
그리고 J가 한국으로 입국한 뒤 서울에 머무른 약 한 달간 대략 대여섯 번 정도 만났다.
그러고 보면 참 기묘한 인연이다.
J는 말레이어를 쓰는 곳에서 나고 자랐고,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다.
그러나 우리가 대화를 할 때에는 영어를 쓴다. (호주로 어릴 적 이주한 그의 영어가 훨씬 뛰어나다)
솔직히 말해, 내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나 자신을 드러낼 때 더 대담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 그가 안고 있는 문제를 서로 토로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익숙하지 않은 언어라는 점 때문에, 가끔은 내가 J의 진의를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따라잡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여행을 함께 해 온 것을 보면 서로의 솔직함이―비록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은 아니었을지언정―서로에게 의지가 되었던 것 같다.
한번은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터놓은 적이 없는 컴플렉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로를 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의견충돌도 적지 않았다. 특히 여행계획에 관한 부분이 그랬다.
생각해보면 그는 여행을 나선지 3년차에 접어드는 여행자 신분이고, 나는 짧게나마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졸업생 신분이기에 이런 만남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J는 6월 첫째 주 한국을 떠났다.
매번 그에게 '너의 여행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라고 물으면, 'No Plan'이라는 무미건조한 대답이 되돌아올 뿐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사람이다.
가끔 무섭다. 이렇게 급속도로 다가온 인연이.
있는 그대로 감사히, 그리고 겸허히 받아들여 하는데, 무엇보다 이 나이라면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에 무뎌질 법도 한데, 자꾸 내 마음의 어느 한 구석을 아릿하게 만든다.
지금도 J와 연락을 계속 주고 받고 있는데, 은근히 (아니, 대놓고) 자신의 여행에 동참했으면 하는 눈치다.
하지만 나는 그와 다른 우선순위를 두고 삶을 살고 있다.
어쩌면 때가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으려니 편히 생각하고 있다.
아그라에서 버스를 함께 내린 그가, '한국에서 왔어요?'하고 어눌한 한국어로 물어온 그 짧은 순간을 떠올려 보면 아직도 절로 웃음이 난다.
J는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을 구별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여하간 갑작스런 한국어에 놀라고, 그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경계하고, 동행하기 시작하면서 급속히 마음을 터놓았던 그 일련의 심리 변화가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좋은 인연이라는 것.
만든다면 만들 수 있는 것, 그렇지만 만든다는 의지만으로는 능사가 아닌 것.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가까워진 인연은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연은 비안개처럼 엉겼다가도 순식간에 흩어지는, 다섯 손가락으로 쥐어보려 하지만 잡히지 않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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