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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昔話し)여행/2017 일본 나고야 2017. 12. 29. 18:11
"이 술을 먹고 나면 다음날 아침 기운이 솟을 거야! 건배!"
주인장 할아버지가 직접 빚으셨다는 술을 내오시며 할머니가 뽀빠이 포즈를 취해 보이신다. 달콤한듯 향긋한 술내음. 깔끔한 청주(清酒)의 향이다. 할머니는 오늘의 여행이야기가 내심 궁금하셨던 모양이었다. 곧장 자리를 뜨시질 않는다. 그렇게 할머니의 옛날 옛적 이야기로 이어졌으니..
"할머니, 료칸에서 일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50년 이 일을 해왔어. 19살에 시작했으니 올해 내 나이 69살이라우. 청년의 나이를 듣고 보니 내 나이를 나눠주고 싶구려."
"줄곧 이곳에서 일을 하셨던 건가요?"
"원래는 역앞에 있던 시댁의 료칸에서 일을 하다 남편이 이 일을 우리 외가의 료칸으로 옮겨오면서 그 이후로는 쭉 이곳에서 일을 해오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의 손은 고된 노동으로 반들반들해져 있었고 가락 끝은 굽어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야무지고 당차다.
"여행은 며칠 와 있는 거요?"
"휴일을 이용해서 2박 3일 어머니와 여행을 왔어요.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휴일이거든요."
"내게는 휴일이 전혀 없다우. 휴일이라곤 늦은 밤 잠깐 쉬는 것 정도지."
이렇게 말하는 할머니의 표정에는 치기 어린 시선, 지난날에 대한 회한, 일에 대한 사명감 같은 것들이 오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덤으로 시골할머니들 특유의 기분나쁘지 않은 오지랖까지.
"형제는 어떻게 되오?"
"여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얼굴을 직접 보고 싶어 하시기에 휴대폰을 꺼내 가족들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파트라는 주거문화에 익숙할리 없는 시골할머니에게는 평범한 우리집이 꽤 근사하게 보였나보다. 그런 데다 그간 한국인의 발길은 없었는지, 우리 일행을 범상치 않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몇 번이고 좋은 집에 사는 것 같다는 말을 읊으시기에, 그저 그렇지 않다고 답할 뿐이었다.
"나는 14형제라우. 그 중에서도 막내지. 어려서부터 응석을 부리면 안 되는 게 없었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를 꺼내신다.
"14형제요?!?!?"
놀라서 반문했다.
"할머니 고향은 어디세요?"
"시라카와고(白川郷) 맞은편에 자리잡은 마을에 살았어. 지금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사라졌지만.."
히다(飛騨)―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배경―의 고장 이곳은 정말로 사라진 옛 마을이 있나보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옛날에는 하도 못 살아서 곰을 잡아 먹었다우. (여기서 나는 한 번 더 놀라 반문했다.) 아버지가 총으로 탕탕 곰을 잡아오셨어. 토끼도 먹고 비둘기도 먹던 시절이 있었다우. 소쿠리로 함정을 놓아서 비둘기를 잡는 게지. 그때는 히다규(飛騨牛) 그런 거 없었어. 그런가 하면 눈은 어찌나 왔는지,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일층이 눈에 잠겨서 2층으로 드나들곤 했다우. 하루는 하굣길에 칸지키(樏;눈에 빠지지 않도록 신발 아래 덧대는 신발)를 잃어버린 거야. 그럼 나는 울음부터 터뜨렸지. 그러면 언니, 오빠가 어부바를 해서 집에 데려다 주곤 했어. 요즘은 형제가 많은 집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형제가 많다는 건 좋은 거라우."
그 시절을 떠올리는 할머니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참새나 개구리를 먹었다는 어렵던 시절의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곰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이어서 동네 자랑이 이어진다.
"여기 사람들 모두 상냥하죠? 타카야마(高山)는 여행하기 참 좋은 곳이야. 평화로운 곳이지. 길을 못 찾는다고 하면 그 장소까지 바래다줄 사람들이 타카야마 사람들이라우."
그러고 보면 무뚝뚝해보이던 사람들도 길을 묻거나 물건에 대해 질문하면 묻지 않은 내용까지 친절하게 알려주곤 했다. 잠시 사투리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 할머니의 일본어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곳은 산에 에워쌓인 데다 겨울이면 눈에 가라앉는 외딴 마을이니까.
이야기를 하다보니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온다. 시라가와고는 쌓인 눈의 두께가 어마어마했는데 50분 거리를 지나 타카야마에 오니 그새 비가 내린다. 겨울비다. 그 빗줄기가 나무지붕을 투덕투덕 두드리니 타카야마에서의 이틀째 저녁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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