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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드라마/짐 자무쉬/패터슨(아담 드라이버),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118>
Love song
What have I to say to you
When we shall meet?
Yet—
I lie here thinking of you.
The stain of love
Is upon the world.
Yellow, yellow, yellow,
It eats into the leaves,
Smears with saffron
The horned branches that lean
Heavily
Against a smooth purple sky.
There is no light—
Only a honey-thick stain
That drips from leaf to leaf
And limb to limb
Spoiling the colours
Of the whole world.
I am alone.
The weight of love
Has buoyed me up
Till my head
Knocks against the sky.
See me!
My hair is dripping with nectar—
Starlings carry it
On their black wings.
See, at last
My arms and my hands
Are lying idle.
How can I tell
If I shall ever love you again
As I do now?
하루는 날을 잡아 영화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연달아 영화를 봤다. 영화 <패터슨>은 <굿타임>을 보고난 뒤 본 영화인데, 긴박감과 감정연기가 쭈욱 깔려 있던 <굿타임>을 보고난 직후여서일까 조금은 심심한 느낌으로 관람했던 영화다. 나가세 마사토시(永瀬正敏)가 등장하는 영화의 끝 장면에서는 감탄의 탄식이 흘러나왔지만서도...ㅎㅎ 그렇기는 하지만 짐 자무쉬의 작품이라곤 서부영화 <데드맨>을 본 게 전부인 데다가, (<데드맨>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는 갖가지 비유가 활용되기 때문에 영화 전반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리뷰 역시 종종 그래왔듯 다른 리뷰(Paterson, the quietly philosophical tale of a bus-driving poet, is one of 2016's best films, 『vox』)를 일부 참조했음을 미리 밝혀 둔다. 참고로 이 영화는 2016년에 공개되었기 때문에, 참조한 리뷰 또한 2017년 초에 작성된 조금은 오래된 텍스트다.
1. William Carlos Williams
이 영화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주인공 패터슨이 평소 가장 좋아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미국의 시문학자로 이른바 상징주의(Imagism)를 전개한 인물이지만, 그의 본업이 소아과 의사이며 의사로서 40년간 몸담아 일을 했다는 사실이야 말로 놀라운 일이다. 마치 패터슨이 매일 아침 버스에 기어를 넣기 전 종이 노트에 시문을 사각사각 적어내려가는 것처럼.
요(要)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생애에 걸쳐 제창하고 추구했던 시 세계―또한 영화에서 패터슨이 몸소 실천하고 있는 시 양식―의 특징이다. 그는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소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했으며, 이때 사물에서 발견된 특징과 느낌, 리듬을 명료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영화에서 패터슨이 시상(詩想)으로 삼는 것은 성냥갑, 낙하하는 물 등이다. 처음에는 지극히 평범한 하늘색 성냥갑이 어떻게 시가 될 수 있을까 참 매니악하다는 느낌마저 들지만, 막상 시가 다음 행으로, 또 그 다음 행으로 이어지는 것을 듣다보면 그 사소한 물건에서 힘 같은 것이 느껴진다.
패터슨이 매일마다 노트에 적어내려간 시의 가치를 안 로라는 패터슨에게 시집을 출간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지만, 패터슨의 반응은 늘 뜨뜻미지근 할 뿐. 패터슨이 시를 쓰는 것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부족하다고 느껴서도 아니다. 아침마다 의자 위에 개켜 놓은 옷을 차려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를 쓴다는 것은 그의 삶에 일부분을 이루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결국 그가 빼곡히 시를 적어 왔던 노트는 그가 애지중지 기르던 강아지(마빈)의 심술과 함께 종이 부스러기가 되어 허무하게 흔적도 자취도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영화의 끝에 일본인이 암시하듯, 새로운 공백은 곧 새로이 채워나갈 공간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항상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표현을 강조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또는 패터슨의―글쓰기 방식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다시 한 번 그 의미가 입증된다.
This Is Just To Say
I have eaten
the plums
that were in
the icebox
and which
you were probably
saving
for breakfast
Forgive me
they were delicious
so sweet
and so cold
2. TWINS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궁금증을 자아냈던 것은, 8일간의 기록에서 예기치 않은 공간, 예기치 않은 시각에 패터슨이 쌍둥이들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이 '쌍둥이'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라는 인물에 대해 짚고 넘어왔으니, 가장 먼저 떠올려볼 수 있는 것은 동일인물로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와 패터슨이다. 전자는 시적인 상징주의를 주도했다면, 짐 자무쉬는 패터슨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영화적인 상징주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실제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와 패터슨은 공통분모가 많다. 똑같이 뉴저지의 패터슨에 살았고, 패터슨은 이름 자체가 아예 마을 이름 그대로이다.
개인적으로 일곱 차례에 걸친 서로 다른 쌍둥이 형제자매의 등장은,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패터슨>의 이야기 흐름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장치라는 생각도 든다. 관객으로서 내가 쌍둥이가 화면에 나타날 때마다 느꼈던 것은 먼저 '생경감', 다음으로는 '그래서 저 쌍둥이들이 다음에 맡은 역할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매일마다 그것도 서로 다른 인물의 쌍둥이와 마주친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이러한 장치는 또 발견되기도 하는데, 강아지와 산책하고 있던 패터슨에게 접근한 젊은이들이 강아지가 납치당하지(dog-jacked) 않도록 조심하라는 협박조의 멘트가 그것이다. 패터슨의 삶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 개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개는 무탈한 상태로 영화가 끝난다. 짐 자무쉬 식 유머 코드인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이러한 장면들이 있기 때문에 영화에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쌍둥이의 등장을 단순히 유머 코드의 하나로 볼 수만은 없는 것이, 패터슨이 쓰는 시들 하나하나는 닮은 구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골목 모퉁이에서 또는 벤치에서 쌍둥이를 발견할 때마다 패터슨은 경계심 어린 시선을 보낸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똑같은 두 사람이 맞나?하고 의심이 든다는 듯이. 결국 여기서도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는 사실은, 늘 새로운 사물 새로운 시야에 눈을 뜨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무인세탁소에서 심취해서 랩을 내뱉던 젊은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No ideas but in things, no ideas but in things. 모호한 관념에 매이지 말고 실체에 더 가까워지라는 직접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Spring and All, XIV
Of death
the barber
the barber
talked to me
cutting my
life with
sleep to trim
my hair—
It’s just
a moment
he said, we die
every night—
And of
the newest
ways to grow
hair on
bald death—
I told him
of the quartz
lamp
and of old men
with third
sets of teeth
to the cue
of an old man
who said
at the door—
Sunshine today!
for which
death shaves
him twice
a week
3. BLACK & WHITE
쌍둥이들의 등장만큼이나 해석하기 까다로웠던 것이 흑백에 대한 아내 로라의 집착이다. 패터슨에게 뮤즈와도 같은 이 여인은 집요하게 블랙&화이트 컨셉을 고수한다. 커튼 장식부터 컵케익 장식, 그녀가 구매한 기타에 이르기까지 흑백이 빠지는 곳이 없을 정도다. 이 부분은 해석을 찾는 게 쉽지 않았는데, 이현령비현령이라고 관람객인 나의 (전적으로) 주관적인 관점에서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을 해보았다.
첫째, 흑과 백은 보색(補色)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비가 극명한 색깔이다. (또한 종이와 잉크의 색깔이 흰색과 검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영화는 주말을 제외하고 '침대>버스>집>바'라는 고정된 스토리라인을 반복하고 있는데, 무의미하게 부유(浮游)하는 듯한 일상의 구성요소―그것이 맥주든 치즈파이이든, 퀴노아 수프든―들을 '명료한' 시선 안에 붙잡아 두고자 흑백이라는 색의 패턴을 일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평범한 사물에서 색다른 이미지를 뽑아내어 또렷하게 표현하라고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말하듯이.
두 번째 해석은 감독인 짐 자무쉬의 연출과 관련된 것인데, 짐 자무쉬라는 인물 자체가 데뷔 초부터 흑백 영화를 많이 만들었던 인물이다. 내가 보았던 <데드맨>도 그러하고, <천국보다 낯선>, <커피와 담배> 모두 느와르 양식의 흑백영화다. 때문에 본인의 개성을 영화 안에 녹여내고자 의도적으로 흑백을 활용한 것이 아닌가 또 다른 유추를 해본다.
# GRATEFULNESS
시를 통해 숨을 쉰다는 무명의 일본인. 마지막 장면에서 (뜬금없게도) 미래에서 온듯한 표정으로 다가온 일본인의 손에는 이미 <패터슨>이라고 가타카나로 쓰여진 책이 들려 있다. 그렇게 시원한 폭포수를 앞에 두고 벤치에 앉아 일본에서 온 시인과 패터슨이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는데, 패터슨이 버스 운전수라는 말을 들은 시인은 '아-하'하는 어색한 감탄사와 함께 참 시적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시인이라고 밝힌 이 일본인은 번역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데, '번역이란 우비를 입고 샤워하는 것과 같다'는 그의 기막힌 표현이 와닿았다. 최근 개인적으로 적고 있던 시집을 강아지가 없애버렸다는 패터슨의 말에 일본인은 다음과 같은 명대사를 읊는다.
Sometimes empty page presents more possibilities.
우리 사는 세상은 너무 잘게 쪼개져 있어 고독함에 빠지기 쉽다. 또한 우리 사는 세상은 너무 거대해서 용기 있게 앞장서 자신을 표출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현대인에게 이 두 가지 딜레마는 강박적인 것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일상의 소중함,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소한 감사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동네가 아닌데도 뉴저지의 패터슨이라는 마을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없는 대화들, 평범한 차림의 사람들, 작은 행복감.. 우리는 정작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들에 무관심했는지 모른다. 내 삶에 무지막지하게 큼지막한 공백을 하나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에 마침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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