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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한나 아렌트/한길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과제이자 잠재적 위대성은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또 어느 정도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산출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작업·행위·언어의 능력을 가진다는 데 있다. 그래서 죽을 운명의 인간은 이것들을 통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불멸하는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한다. 불멸적인 행위업적과 사라지지 않을 흔적을 뒤에 남기는 능력으로 인해―개별적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불멸성을 획득하고 스스로를 신적 본성을 가진 존재로 확증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 종 자체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을 항상 최고의 존재로 증명하고 사라질 것들보다 불멸의 명예를 좋아하는 가장 뛰어난 자만이 참된 인간이다. "자연이 제공하는 쾌락에 만족하는 자", 그는 동물처럼 살다가 죽는 자다. 이런 생각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어떤 철학자에게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p. 80
세 가지 활동과 각각의 조건들은 인간실존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 즉 탄생과 죽음, 탄생성과 사멸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노동은 개인의 생존뿐 아니라 종의 삶까지 보장한다. 작업과 그 산물, 즉 인간의 인공물은 유한한 삶의 무익함과 인간적 시간의 덧없음에 영속성과 지속성을 부여할 수단을 제공한다. 행위가 정치적 조직의 건설과 보존에 참여하는 한 그것은 기억의 조건, 다시 말해 역사의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다. 행위와 마찬가지로 작업과 노동도 탄생성에 뿌리를 둔다. 즉 작업과 노동이 이방인으로서 세상에 태어나는 새내기들의 꾾임없는 유입에 맞추어 세상을 마련하고 보존하는 임무와 이를 예견하고 처리하는 임무를 떠안는다면, 탄생성에 뿌리를 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중에서 행위는 탄생성이라는 인간의 조건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탄생에 함축된 새로운 시작은 새내기가 어떤 것을 새롭게 시작할 능력, 즉 행위능력을 가질 때에만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창발성의 의미에서 행위의 요소, 즉 탄생성의 요소는 인간의 모든 활동에 들어 있다. 더욱이 행위는 정치적 활동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사멸성이 아닌 탄생성은 정치적 사상의 핵심 범주가 된다.
―p. 75
가정이 가장 엄격한 불평등의 장소인 반면, 폴리스는 오직 '평등'만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가정과 뚜렷이 구별된다. 자유롭다는 것은 삶의 필연성이나 타인의 명령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고 또 타인에게 명령하는 것도 아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지배하거나 지배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정 영역 안에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정의 지배자인 가장은 가정을 떠나, 모든 사람이 평등한 정치적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을 가질 때에만 자유롭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런 정치적 영역의 평등성은 우리의 평등 개념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것은 자신과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 살고 이 사람들하고만 관계 맺는 것을 의미하며 또 실제로 도시국가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불평등한 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근대와는 달리 정의와 무관한 평등이 자유의 필수적 본질이었다. 즉 자유롭다는 것은 지배관계에 내재하는 불평등에서 벗어나서 지배와 피지배 둘 다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p. 103
사회의 출현은 가사 활동의 문제와 조직 형태가 가정의 어두운 내부에서 공론 영역의 밝은 곳으로 이전된 것을 말한다. 이로 말미암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던 옛 경계선은 불분명해졌고, 두 용어의 의미와 이것이 개인과 시민의 삶에 대해 지녔던 중요성도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까지 변했다. 우리는 공동세계 밖에서 오직 '자신의 것(idion)'의 사생활로 일생을 보내는 삶을 '백치와 같은 삶'(idiodic)이라고 정의한 그리스인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으며, 사생활은 공적 존재로부터의 일시적 피난처일 뿐이라는 로마인의 생각에도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오늘날 사적인 것을 친밀성의 영역이라 부른다.―p. 109
루소와 낭만주의자들은 사회에서 친밀성을 발견했고, 그런 사회에 반항했다. 반항은 특히 사회의 평준화 요구, 오늘날 모든 사회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순응주의라 부르는 경향을 겨냥하고 있다. 이 평등이 원칙이 사회적·정치적 영역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기도 전에, 반항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민족이 평등한 또는 불평등한 사람으로 이루어졌는가는 순응주의의 관점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회는 언제나 그 구성원이 하나의 의견과 하나의 이해관계만을 가질 수 있는 거대한 가족 구성원인 것처럼 행동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사회가 모든 발전단계에서 행위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 대신 사회는 각 구성원으로부터 일정한 행동을 기대하며, 다양하고 수많은 규칙들을 부과한다. 이 모두는 구성원을 '표준화'시키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도록 만들며, 자발적 행위나 탁월한 업적을 갖지 못하게 한다.이런 근대적 평등은 사회에 내재하는 순응주의에 기초하고 있고 또 행동이 인간관계의 최고 양태인 행위를 대체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근대의 평등은 모든 면에서 고대의 평등과는 다르며, 특히 그리스 도시국가의 평등과는 매우 다르다. 이곳에서 소수의 '평등한 사람'에 속한다는 것은 곧 그런 동류집단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공론 영역 자체인 폴리스는 격정적인 정신으로 충만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자신의 특성을 부각시켜야 했고, 독특한 행위와 업적을 통해 자신이 최고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달리 말해 공론 영역은 개성을 위해 준비된 곳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꿀 수 없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p. 111~113
원래 '박탈된'이라는 의미를 가진 '사적'이라는 용어는 공론 영역의 다양한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완전히 사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선 진정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타인이 보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현실성의 박탈, 공동 사물세계의 중재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분리됨으로써 형성되는 타인과의 '객관적' 관계의 박탈, 삶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 사적 생활의 이 박탈성은 타인의 부재에 기인한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한, 사적 인간은 나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된다.―p. 132
법률은 문자 그대로 담이었다. 담이 없다면 집의 집합체인 도시만 존재하지 정치적 공동체인 도시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담벽과 같은 법률은 신성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은 담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담 없이 소유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법의 담벽 없이 공론 영역은 존재할 수 없다. 담이 가족의 생물학적 삶의 과정과 소유를 보호하는 경계라면, 법률은 정치적 삶(공론 영역)을 둘러싸고 보호하는 울타리였던 것이다.―p. 138
이전에 사적인 가정의 영역으로 추방된 활동의 결과였던 공동의 부가 공론 영역을 인수하게 되었을 때, 사적 전유는 세계의 지속성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부는 개인의 생애 동안 모두 소모될 수 없을 정도로 축적되었고 개인을 넘어서서 가족이 부의 소유주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부가 아무리 오랫동안 지속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늘 사용되고 소비되는 대상으로 남았다. 자본의 주요 기능은 보다 많은 자본의 증식인데, 부가 이런 자본이 되는 경우에만 사적 소유는 세계에 내재하는 영속성과 동등한 성격을 가지게 되거나 그것에 가까운 것이 된다. 그러나 영속성의 본질은 다르다. 사적 소유는 한정적 구조의 영속성이기보다 과정의 영속성이다. 영속적인 부의 축적과정이 없다면, 부는 즉시 사용과 소모를 통해 분해되는 반대의 과정으로 전락한다.우리는 사적 영역이 사회적 영역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부동산이 동산으로 변형되는 것에서 가장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결국 로마법에서의 대체물과 소비물의 구분에 해당하는 소유와 부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모든 구체적인 '대체가능한 사물'은 '소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대체가능한 사물은 그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사용가치를 상실하고, 항상 변하는 교환가능성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가치만을 획득한다. 이 교환가능성의 변동은 돈이라는 공통분모와 관련을 맺음으로써 단지 일시적으로 고정될 수 있다.―p. 143~144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에는 편견일지는 모르지만, 작업과 노동의 보다 더 근본적인 구분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수고를 한 시간만큼 수고의 결과도 빨리 소비되는 것이 노동의 특징이다. 이런 수고는 무상성에도 불구하고 더할 수 없는 긴박성에서 생겨났으며, 삶 자체가 그것에 달려 있기 때문에 어떤 다른 것보다 강력한 힘이 그 동기가 된다. 서구인의 전례 없는 실질적 생산성에 압도되어 모든 노동을 작업으로 간주한 일반적인 근대와 마르크스는 호모 파베르가 더 적함한 표현인데도 노동하는 동물을 말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노동과 필연성을 한꺼번에 제거하기 위해서 오직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만 필요하다는 희망을 줄곧 갖고 있었다.―p. 164~165
자연과 살아 있는 모든 사물이 강제로 떠밀려 들어가는 자연의 주기적 운동은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탄생도 죽음도 알지 못한다. 인간 존재의 탄생과 죽음은 단순히 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하며 복제불가능한 실재인 유일한 개인들이 이 세계에 왔다가 이 세계를 떠난다. 탄생과 죽음이 전제하는 것은 부단한 운동 속에 있지 않지만 그 지속성과 상대적 영속성 때문에 나타남과 사라짐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다. 이 세계는 여기에 출현한 어떤 개인보다 앞서 존재했고 그가 떠난 후에도 남아 있다. 인간이 태어나는 장소로서 세계, 죽을 때 떠나는 세계가 없다면, 불변의 영원회귀외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p. 175
근대세계가 필연성에 거둔 승리는 노동의 해방, 즉 노동하는 동물이 공론 영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그다지 탐탁스럽지는 않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하는 동물이 공론 영역을 가지는 한, 진정한 공론 영역은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 활동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완곡하게 표현해서 '대중문화'다. 이 문화의 뿌리 깊은 문제는 보편적 불행이다. 이 불행은 한편으로는 노동과 소비의 불안한 균형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모와 재생, 고통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삶의 과정이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곳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 즉 행복에 대한 노동하는 동물의 집요한 요구 때문이다. 행복에 대한 보편적 요구와 우리 사회의 광범위한 불행은 만족하며 살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노동을 하지 않는 노동사회에서 우리가 살기 시작했다는 가장 설득력 있는 표시다.―p. 216~217
사유와 인식은 같지 않다. 예술작품의 원천인 사유는 모든 위대한 철학에서 변형되거나 변신하지 않고도 분명히 표출된다. 반면 지식을 획득하여 저장하는 인식과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과학이다. 인식은 실천을 고려하여 결정한 것이든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설정한 것이든 항상 명확한 목표를 가진다. 일단 이 목표가 달성되면 인식과정은 끝난다. 반대로 사유는 목적도 없고 자기 외부의 목표도 없다. 사유는 심지어 결과를 산출하지도 않는다. 호모 파베르의 공리주의 철학뿐만 아니라 행위하는 인간과 과학적 결과를 애호하는 자도 사유가 얼마나 무용한지를, 그리고 사유가 영감을 불어넣는 예술작품만큼이나 무용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싫증내지 않았다. 더욱이 사유는 이 무용한 생산물에 대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해 이 생산물들과 위대한 철학적 체계들은 순수 사유의 결과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술가자 철학자는 자기 작품의 물질적 사물화를 위해 바로 이 사유과정을 중단하고 변형해야 한다. 사유의 능동성은 인생 자체만큼 냉혹하고 반복적이다. 사유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의 문제는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만큼 대답할 수 없는 수수께끼다. 사유의 과정은 인간의 실족 전체에 너무나 깊이 침투하여 사유의 시작과 끝은 인생의 시작과 끝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사유가 호모 파베르의 세계적인 생산성을 고무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호모 파베르의 특권이 아니다. 사유가 자신이 호모 파베르의 영감의 원천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호모 파베르가 도를 지나쳐 무용한 것을 생산하는 경우뿐이다. 여기서 무용한 것이란 물질적·정신적 욕구, 즉 육체적 필요나 지식에 대한 갈망과 무관한 대상들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인식은 예술과 정신적 생산과정을 포함한 모든 과정에 속한다. 제작과 비슷하게 인식은 시작과 끝이 있는 과정이다. 이 과정의 유용성을 검증됐다. 즉 이 과정이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다.―p. 258
말과 행위의 기본조건인 인간의 다원성은 동등과 차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가진다. 만일 사람이 동등하지 않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이전 세대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으며, 미래를 계획하거나 장차 태어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사람들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즉 현재 살고 있거나 과거에 살았거나 미래에 살게 될 사람들이 다르지 않다면, 사람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하거나 행위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이고 동일한 필요와 욕구를 전달하기 위한 기호나 표식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p. 263
시작하는 것(아르케인)과 행위하는 것(프라테인)은 전혀 다른 두 활동이 될 수 있다. 시작하는 자는 '결코 행위할 필요가 없으며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자들을 지배하는 지배자'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의 본질은 '시기의 적절성을 고려하여 중대한 문제를 시작하고 지배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행위 자체는 완전히 제거되어 '명령의 단순한 실행'이 된다. 플라톤은 처음으로, 행위를 시작과 성취로 나눈 옛 표현 대신 알지만 행위하지 않는 자와 행위는 하지만 알지 못하는 자를 구분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행위가 되었다.―p. 317
만약 주권과 자유가 동일하다면 어떤 인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완고한 자기 충족과 자기 지배의 이상인 주권은 다원성의 조건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아니라 다수의 인간이 지구에 거주하는 까닭에 또 플라톤 이래 전통이 주장하듯이 인간의 유한한 힘은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까닭에 어느 누구도 엄밀한 의미에서 권적 또는 자주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p. 330
근대 신앙의 상실은 종교적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근대의 2대 종교운동인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도 않는다. 그 상실의 범위도 결코 종교적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더욱이 근대가 초월성과 사후세계에 대한 빋음의 갑작스러운, 더 이상 설명불가능한 살싱과 함께 시작했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런 신앙의 상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계에 더욱 충실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역사는 오히려 근대인이 세계를 지향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의존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철학의 가장 집요한 흐름이자 철학에 가장 독창적 기여를 한 것 중 하나는 영혼, 인격 또는 일반적 인간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배타적 관심이며, 세계와 다른 인간존재와의 모든 경험을 인간과 그 자신 간의 경험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다.―p. 353~354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는 세속화의 과정, 즉 데카르트적 회의의 필연적 결과인 근대의 신앙의 상실이 없었다면 결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회의로 말미암아 개체의 생명은 그 불멸성을 박탈당했거나 적어도 불멸성에 대한 확신을 상실했다. 고대와 마찬가지로 이제 개인의 생명은 사멸적이 되었다. 그리고 세계는 기독교 시대보다 더 안정적이지 못하고 더 영속적이지 못해서 더 의지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도래한 세계에 대한 확실성을 살실하자 근대인은 이 세계가 아니라 자신에게 내던져졌다. 근대인은 세계가 잠재적으로 불멸할 수 있다고 믿기는커녕 심지어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조차 믿지 않았다.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과학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외견상 성가시지 않은 낙관주의의 입장에서 세계가 실재한다고 가정하는 한, 근대인은 자신을 지구로부터 훨씬 더 먼 곳으로 떼어놓았다. 기독교의 내세성도 이만큼 인간을 멀리 옮겨놓은 적은 없었다. '세속적'이라는 말이 지금의 용법에서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말을 세계성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어쨌든 근대인은 내세를 상실했을 때 이 세계를 얻지 못했다. 근대인은 엄격히 말하자면 생명을 얻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로 내던져졌고 폐쇄된 자기반성의 내부로 내던져졌다. 여기서 그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계산하는 정신의 텅 빈 과정이며 자기 자신과 행하는 정신의 작용이다. 이 정신에 남겨진 유일한 내용은 탐욕과 욕망, 즉 신체의 무감각적인 충동이다. 근대인은 이 충동을 열정으로 오해했으며 '추론'할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고대의 정치조직체와 중세 개인의 삶처럼 지금 잠재적으로 불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삶 그 자체, 즉 인간 종의 잠재적으로 영속하는 삶의 과정이다.―p. 429~430
여유를 갖고 글 쓸 짬을 찾기조차 힘든 요즈음, 한 문단에서 다음 문단으로 넘거가기도 참 벅찬 책이었지만 그만큼 값진 배움을 얻은 책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노동하는 동물이 공론 영역을 집어삼킨 비세계적 공간'이라고 명쾌히 정의 내린 한나 아렌트의 명석한 논리구조에 감탄하였고, 그러한 논리적 틀 안에서 근대인이 고질적으로 시달리는 '불행'이라는 것의 원인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고대(古代)의 평등'이라는 것이 '근대적 의미에서의 불평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책 속에서 말하는 '다원성' 또는 '다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부연설명이 듣고 싶어졌다. 문학이나 역사책은 즐겨 읽었어도 철학만큼은 범접하기 힘든 영역이었는데, 기억에 남는 문구를 정리하며 글을 쓰다보니 다시 한 번 한나 아렌트가 대단하게 느껴지고 철학이 우리 삶에 어떻게 보탬이 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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