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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斷罪),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일상/film 2018. 7. 21. 22:22
<킬링 디어/스릴러/요르고스 란티모스/스티븐 머피(콜린 파렐), 안나(니콜 키드먼), 마틴(배리 코건)/121>
참조 : 『Decoding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the craziest tragedy of 2017』 from VICE
이런 영화를 보는 일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단조로운 배우들의 목소리, 절제된 감정을 통해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을 느끼고 몰입하는 것. 근래에 이런 영화를 보기는 오랜만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받은 느낌과 별개로 영화속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별개의 문제인 모양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는 감독의 작품을 본 것은 <더 랍스터> 정도인데, 이 작품은 주제의 선(線)이 명확한 편이었던 데 반해,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깔끔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비정한 복수극? 권선징악? 부와 명예의 헛됨? 그래서 관련된 아티클들을 찾아보았다. 영화는 큰 틀에서 복수극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권선징악을 말하지만, 이를 전달하기 위해 숨겨진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으므로..
1. GREEK MYTHOLOGY
영화는 <두 개의 사랑>만큼이나 선홍빛이 낭자한 인간의 신체 일부(심장)를 확대했다가 포커스 아웃하는 방식으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 끈다. 단순반복적으로 펌프운동을 하는 근육덩어리는 신체의 혈류를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기관이라는 느낌보다는 정육점에 진열된 고깃덩어리처럼 무의미하게 보이기도 한다. '심장'이라는 소재는 주인공(콜린 파렐)의 직업(심장전문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프랑수아 페리에(François Perrier)의 「제단에 선 이피게네이아(The Sacrifice of Iphigenia)」
원제에서 말하는 'The Sacred Deer'이라 함은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라는 신화의 한 에피소드에서 따온 것이다. 바야흐로 기원전 405년 트로이 원정에 나선 군사령관 아가멤논은 출정 준비를 마친 상황. 아가멤논은 군인을 태운 배를 몰고 에게 해를 건너려 했으나 바닷바람이 불지 않아 돛을 내리지 못한다. 일찍이 아가멤논은 신성시되는 숲에서 사냥 실력을 과시하고자 사슴을 죽인 일이 있었고, 이에 분노한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가 그리스에 바람을 막은 것. 아가멤논은 아르테미스에게 바람을 신탁하기 위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칠지 아니먼 전쟁통에 가족을 잃을지 사이에서 고뇌한다. 결국 이피게네이아를 제단에 올리기로 결정하니제단 위에 피를 흘리는 사슴이 나타난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이 그리스 신화(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꼭 닮아 있다. 머피(콜린 파렐)를 아가멤논에 대입한다면, 안나(니콜 키드먼)는 클리타임네스트라(아가멤논의 아내로 후일 아가멤논을 살해)에, 킴은 이피게네이아에, 동생 밥은 오레스테스(이피게네이아의 동생으로 후일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 정도에 대입시킬 수 있을까. 극중 가장 섬뜩한 연기를 보여주는 마틴은 제물을 요하는 에르테미스에 비유할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라는 에피소드를 실은 <호메로스> 자체가 근친간의 상잔이 대(代)를 거쳐 거듭되는 저주받은 탄탈로스 가문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비유를 담은 머피 일가의 이야기 자체는 끔찍한 비극 그 자체라 할 수 있고, 그런 비장미를 극대화하고자 한 것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의도였을 것이다. 특히 극중 인물들의 목소리 톤이 굉장히 일관되고 매우 경직된 느낌까지 주는데, 무언가를 늘 의식하고 있는 듯한 그런 말투가 개인적으로는 소름끼칠 정도로 영화에 긴장감을 준 요소였던 것 같다.
물론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아버지의 원한을 앙갚음하기 위해 복수에 나선 마틴이라는 소년은 그리스 신화 속 아르테미스처럼 전지전능한 인물도 아니고, 오히려 음흉하고 무자비한 인물이다. 머피의 아내 안나 또안 그리스 신화와는 거리가 있다. 아가멤논이 자신을 속여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희생시키려 한 사실을 뒤늦게 안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 분노를 잊지 않고 있다가 트로이 원정에서 돌아온 아가멤논을 가차없이 살해한다. 하지만 영화 속 안나는 다르다. 마틴이 어떤 원한을 갖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진실을 파헤치고, 필요하다면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가족 구성원의 어느 하나를 제물로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 지하실에 결박해 두었던 마틴을 풀어주는 행위 또한 클리타임네스트라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대범한 행동이다.
접점을 찾기 어려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제물이 누가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의 정석대로라면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은 킴이다. 그러나 가장 먼저 걷는 기능을 상실하고, 거식증을 앓다 급기야 눈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아들 밥이다. 제물로 바쳐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던 신화 속 이피게네이아와는 달리, 딸 킴은 적극적으로 제물이 될 것을 자처한다. (아빠가 생명을 주셨으니 아빠가 제 생명을 처분해도 괜찮다는 대사가 이러한 킴의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낸다) 그뿐 아니라 가정에 불행을 가져온 마틴을 사랑하고 따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의 복수는 아들 밥에게 겨냥된다.
앤드류 와이어스(Andrew Wyeth)의 「크리스티나의 세계(Christina's World)」
2. Andrew Wyeth & Christina Olson
그리스 신화에서 빌려온 모티브를 차치하고 감독이 담고 있는 또 다른 모티브를 찾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체적인 불능상태다. 의학적으로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상태로 밥은 다리에 감각을 잃고 음식을 거부한다. 또한 나중에 가서는 눈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거나 피눈물을 흘린다는 비유는 그래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걸을 수 없게 된다는 저주의 설정은 조금은 특이하다. 밥에 이어 킴까지도 걷는 기능을 상실하는데 영화는 '이동능력(Mobility)'을 수행하는 다리가 무능해졌을 때 그 주위세계를 어떻게 침식해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 사실주의 화가 앤드류 와이어스는 일찍이 펜실베니아 일대의 풍경을 배경으로 작품을 남겼다. 풍경 외에 그가 천착한 것은 크리스티나 올슨이라는 한 여성의 삶인데, 이 크리스티나라는 여성은 소아마비를 앓아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앤드류 와이어스가 그녀를 작품에 끌어들인 것은 신체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생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는 한 인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모든 비극이 아가멤논이라는 개인의 과오에서 빚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킬링 디어>라는 비극이 부여하는 고통은 머피―심지어 이름조차 불운이 이어진다는 머피의 법칙(Murphy's law)과 똑같다―가 떠안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그러나 마틴의 과녁에 머피는 빠져있다. 그의 아내, 그의 딸, 그의 아들이 복수의 대상일 뿐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가족이 겪는 신체적 불능성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이상증세를 보이고 결국 실제 제물이 되어버린 밥과 달리 누나 킴은 비록 걷는 기능은 상실했지만 간헐적으로 걷는 능력을 되찾기도 한다. 한편 안나에게는 언제쯤 마틴의 저주가 찾아올지 긴장을 멈출 수 없었지만 끝내 마틴의 저주는 그녀를 빗겨간다.
앤드류 와이어스는 그림을 그릴 때에 섬약한 팔다리는 크리스티나의 팔다리를 그리면서도 몸통을 그릴 때만큼은 건강한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작가는 그림 속 한 명의 가녀린 여성에 양가적인 의미를 투영시켰으나,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은 그림 속 여성에 두 명의 모델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림 속 여성의 모호한 움직임은 보는 이에게 시각적인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녀는 농가(農家)에 다가가려는 것인가 멀어지려는 것인가. 실제로 영화에는 하반신이 불구가 된 몸으로 집을 벗어나려는 킴이 무릎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이 나온다. 신체에 대한 재해석과 눈으로 보이는 육체 너머의 것을 그리고자 한 앤드류 와이어스의 작품세계는 비슷한 모양새로 영화에 녹아들어 있는 듯하다.
3. ANESTHESIA
영화의 시작에 집도(執刀)를 마친 두 의사가 대화를 나눈다. 자네 시계는 수압을 몇 미터까지 버티나? 시곗줄은 가죽을 쓰나 메탈을 쓰나? 메탈보다는 가죽이 낫지. 가죽보다는 메탈이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시곗줄 바꾸는 사람을 소개해주겠네. 등등.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대화라기에는 너무 시시콜콜해 보이지만 정작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매우 진지하다. 이때 복도를 걸으며 이어지는 사소한 대화에 등장하는 두 인물 중 한 명은 주인공인 머피, 다른 한 명은 마취과의사(anesthesiologist)인 '매튜'다.
'마취(Anesthesia)'라는 메타포는 노골적인 표현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지만 영화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안나는 남편인 머피를 유혹할 때 '전신마취(General Anesthetic)'된 포즈를 취해 보인다. 마치 손쉬운 게임을 즐기듯이. 사실 머피와 그 가족은 마틴이라는 소년이 그들의 일상을 비집고 들어와 파문을 일으키기 전까지 안락한 삶을 살고 있었다. 킴은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밥은 화초에 물을 준다는 식의 만족스러운 일상과 이층짜리 고급주택과 아기자기한 뒤뜰의 존재를 머피와 가족은 의심하지 않았다. 딸의 초경을 자랑거리로 삼는 머피-안나 부부와 매튜 부부의 대화에서는 조금은 비정상적으로 보일만큼 자신들의 삶에 한껏 도취(anethetized)된 머피 일가의 일그러진 초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예의 시계는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머피는 마틴에게 근사한 시계를 선물한다. 수압을 200m까지 견딜 수 있는 고급 시계다. 그 이튿날 마틴은 머피가 근무하는 병원에 찾아와 감사인사를 한다. 메탈 시곗줄을 가죽으로 바꿨다는 말을 덧붙이며. 마틴은 마치 이전에 머피와 매튜가 나눴던 대화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시곗줄을 교체한 것이지만 이때까지도 머피는 마틴을 의심하지 않는다. 때마침 복도에서 다가온 매튜에게 머피는 마틴의 존재를 거짓으로 둘러댄다.
머피 일가의 도취상태가 깨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머피는 맨 처음 자신의 아들이 다리에 힘을 잃고 쓰러졌을 때 아들이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여전히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자신 알고 있는 의료계의 인맥을 동원해 문제를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는 안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들이 도취되어 있던 세계에서 아무런 구원도 얻을 수 없음이 명백해지자 머피와 안나 부부의 눈가에 무력감이 짙게 베인다. 고혹적인 안나의 '전신마취'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잘잘못을 캐묻는 안나에게 머피는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음주상태에서 마틴의 아버지의 수술을 맡았던 일―을 부정하며 "외과의는 환자를 죽이지 않는다"고 거짓을 말하지만, 안나의 회유에 매튜는 진실을 분다. "마취과의사는 환자를 죽이지 않아. 환자를 죽이는 것은 외과의지."
모든 것이 정돈되고 흠잡을 것 없어보였던 머피의 세계에 마틴이 자국을 남긴 작은 흠집은 정신을 차려보니 도려낼 수 없는 커다란 고름이 되어 있었다. 잘못을 덮어둔 채 평화로운 삶에 안착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머피의 상상은 끝났다. 마취는 풀렸다. 대신 그러한 무감각증은 자녀인 킴과 밥에게 하반신 마비의 형태로 전이(傳移)되었다. 지금에 와서 각성(覺惺)했으나 고름을 가라앉힐 길은 없고, 이 혼란에 질서를 부여할 길은 단 하나, 밥의 죽음 뿐이다. (지금도 여전히 남는 궁금증은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의 신화와 달리 왜 아들 밥이 제물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나가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를 정화하여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는 것'을 '비극'이라 정의했다. 개인적으로는 감독이 그리스 신화를 빌려올 때 의도했던 대로 <킬링 디어>라는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는지는 좀 의문이다. 영화에서 가장 이성적으로 들렸던 대사는 안나가 마틴에게 던진 한 마디 질문이다. "잘못은 머피가 했다고 해도 그 책임을 도대체 왜 우리가 져야 되는 거지?"
물론 멀쩡해 보이던 일가족의 일상을 한꺼풀 걷어냈을 때 드러난 추한 민낯에 약간의 통쾌함은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방식 대신 러시안 룰렛을 돌리듯 책임을 전가하는 과정이나 원한을 가질 이유가 충분한 마틴이라는 인물이 순수악처럼 묘사된 부분은 조금 아쉽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무라비 법전의 가르침―눈에는 눈, 이에는 이―을 충실히 따른 이 영화는 인간심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콜린 파렐과 니콜 키드먼은 여전히 매력적인 배우였다'a' (그리고 배리 코건의 무자비한 연기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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