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oubles Vies일상/film 2018. 11. 21. 00:01
<논픽션/드라마/올리비에 아사야스/셀레나(줄리엣 비노쉬), 알랭(기욤 까네), 레오나드(뱅상 맥케인)/108>
종이책의 미래
지금은 다소 사그라들었지만,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등장하면서 한동안 화두가 되었던 것이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였다. 독서할 수 있는 매체가 다양화되고, 특히 각종 소셜네트워크나 전자기기의 발달로 텍스트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면서 전통적인 출간을 담당해 오던 출판사들의 입지와 전략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러한 세태와 맞물려 한편으로는 종이책의 미래에 대한 회의적인 전망을 떠올리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기존의 아날로그식 독서에 기대를 거는 주인공들의 진지한 대화를 보여준다.
종이와 관련된 무엇이든―책, 수첩, 메모지 심지어 필기구까지―간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이러한 논의가 오고간다는 자체가 어쩐지 씁쓸하다. 도서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맡기 위해 출판사에 새로이 부임한 젊은 관리자(로르)는 말한다. 트위터나 하이쿠(매우 짧은 일본의 전통시)나 다를 게 뭐냐고. 요컨대 그녀의 말은 텍스트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과 선호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텍스트 자체를 문제시할 것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디지털을 통해 책을 보급할 수 있게 되면서 소비자들이 책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서 자체가 늘어났는가 하면 이는 별개의 문제다. 민주주의가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는 것과 그래서 얼마나 시민의 의견이 투명하게 반영되었고 그렇게 해서 대변된 의사가 제대로 작동했는지의 문제는 별개인 것처럼.
사실 더욱 의문인 것은 정말 디지털화가 혁신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혁신의 혜택을 모든 이가 공평하게 누리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전자책을 읽기 위해 킨들이나 아이패드를 장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는 그만큼의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얼마나 될까? 물론 알랭(출판사 사장)이 말하는 것처럼 종이책을 구매하는 것 역시 금전적인 지출을 수반하는 일이기는 하다. 책이 독자에게 제공하는 가치에 걸맞게 가격을 매겨야 한다는 것도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 방식이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변환시키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문제의 작가 레오나드(벵상 맥케인)
또 한 가지 생각해볼 문제는 온라인상으로 독자들의 선호를 분석함으로써 잘 팔리는 책을 만들 수 있다는 로르의 말이다. 하지만 잘 팔리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에는 정말이지 동의할 수 없다. 이 부분은 해묵은 논쟁이라 굳이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도구의 발달로 글을 쓰는 일이 간편해지면서―지금 내가 블로그로 글을 쓰는 것처럼―다양하고 많은 텍스트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양적 팽창이 질적 성장과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독자들로서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글을 손쉽게 취사선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텍스트들 사이에서 어느 텍스트를 선택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더욱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선택장애를 줄이기 위해 각종 플랫폼에 도입되고 있는 추천기능이 독자들의 확증편향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종이책의 미래보다는 디지털화된 텍스트의 현주소에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토론하면서도 정답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책이라는 것, 또는 글이라는 것이 앞으로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사고뭉치 남편(레오나드)에게 팩폭을 날리는 아내
Fiction과 Faction, Fact 사이 그리고 위선
책에서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쟁점―그리고 아마 이 영화의 원제가 <Double vies>인 이유 중 하나인―은 작가 레오나드의 문제적 작품 <마침표(Point final)>이다. 영화 속에서 출간 당시부터 논란이 되었던 이 작품은 작가 자신(레오나드)과 전 부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는 점이 문제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책은 흥행몰이에 성공하지만, 여하간 자신의 인격을 침해했다는 이유 때문에 전 부인이 레오나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에 나선다.
출판사를 이끌며 종이책과 책의 디지털화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 알랭(기욤 까네)
모든 예술작품은 자전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예술 작품 안에서 자신이 소개되고 있다고 하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더군다나 그렇게 묘사된 자신이 형편없다면 분노마저 느낄 것이다.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 프루스트도 그러했듯, 예로부터 작가와 극중인물의 실제모델 사이에 마찰이 빚어지거나 절교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이른바 ‘잊혀질 권리’가 거론되는 영역은 매우 다양하다. 무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의 기소사실이 적시된 공보물이 버젓이 방치되거나, SNS에 유포되는 사적인 내용들에 이르기까지 일단 한 번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은 쉽지만 도로 주워담기는 어렵기 때문에 사실상 개인에게 비가역적인 피해를 가하게 된다. 그렇지만 ‘잊혀질 권리’에 대한 주장이 예술영역에서 어느 정도 이뤄질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예술에는 표현의 자유라는 충돌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줄리엣 비노쉬(셀레나役)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적나라한 것에 쉽게 반응하고 그러한 정보를 가진 자는 바로 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려 한다는 점이다. 누가 봐도 개인사를 담은 레오나드의 작품이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가는 것은 그러한 인간심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개인의 신상을 침해당하는 것을 끔찍히 싫어하면서도, 일단 표적이 나타나면 가차없이 주홍글씨를 새기려는 집단심리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레오나드가 인간의 위선적 면모를 그려내려고 의도했던 것이라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본다. 각자의 배우자를 기만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극중의 여러 캐릭터(알랭, 셀레나, 레오나드, 로르까지)들이 얼마나 위선적인가. 그러나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오에 겐자부로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이다. 고통받는 인간의 이의제기가 존중되지 않으면 표현의 자유의 인간적인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표현이라는 허울로 모든 표현이 허용될 수는 없는 일이며, 어디까지가 허용될 수 있는 표현의 영역이며 어디서부터가 경계 밖인지 치열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제조업자가 생산품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듯, 글쓴이는 자신의 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요즘과 같이 무분별하게 텍스트가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라면 말이다.
매력적인 연기를 펼쳤던 로르 역의 크리스타 테렛이 왼쪽 끝에 흰 드레스를 입고 서 있다
'일상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에게는 영욕(榮辱)을, 예술에게는 오로지 영광(榮光)만을 (0) 2018.12.19 내밀(內密)해지는 공간 (0) 2018.12.11 퍼스트맨 (0) 2018.10.27 너는 여기에 없었다 (0) 2018.10.10 9월의 발렌타인 (0) 2018.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