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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2 / 세상 바깥이라면 어디든(N'importe où, hors du monde)여행/2019 스위스 종단여행 2019. 9. 21. 01:27
전날 피르스트로 향하기 위해 그린델발트 역을 거쳐갈 때에 역 매표소에서 융프라우 VIP 패스를 미리 사두었다. 그린델발트에서 4일간 머무르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3일권을 사야 할지 4일권을 사야할지 고민하다 동생과 얘기를 해보고 아무래도 3일권을 사기로 했다. 3일권과 4일권의 가격차가 엄청 컸기 때문. 문제는 티켓의 유효기간이 일단 개시되면 연속해서 3일을 써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일기예보(Meteo)에 따르면 해당기간에 하루이틀 비가 온다고 했기 때문에 3일권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지 좀 의문이었다. 비가 와서 꼼짝달싹 못하고 이동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굳이 VIP 패스를 사는 효용이 없으니 말이다.
이 3일 중 여행 둘째날은 이른 새벽녘까지 비가 온 뒤 아침이 되면 개인다고 되어 있어서, 일단은 당일 아침에 일어나서 날씨를 살펴보고서 판단하기로 했다. 한편 여행 3일차에는 확실히 비가 온다고 예보가 되어 있었다. 아침에 보니 숙소에서 바로 바라다보이는 베터호른(Wetterhorn) 발치에 운무(雲霧)가 짙다. 나보다 더 일찍 잠에서 깨셨던 아빠는 원래 운무가 이보다 짙었다고 하셨는데, 아침 여덟 시를 넘기면서 태양의 위치가 높아지니 제법 날씨가 멀끔해졌다. 완벽하게 좋은 날씨를 기다리기보다는 이날 융프라우요흐를 가기로 했고 이는 잘한 선택이었다.
숙소에서 든든히 아침을 먹고 그린델발트 역으로 향했다. 피르스트 중턱은 마땅히 생필품을 살 수 있는 곳이 없어서, 그린델발트로 가는 길 도중에 쿱(Coop)에 들러 마실 것과 초코바를 샀다. 엄마와 아빠가 쿱에서 물건을 고르는 동안 나와 동생은 멀지 않은 그린델발트 역에서 열차시각을 확인했다. 그런가 하면 스위스에 도착한 날 엄마가 숙소에 잠입한 벌에게 팔을 쏘이셔서(ㅠ), 쿱과 같은 건물 안에 있는 약국(Apotheke)에서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을 사야만 했다.
스위스에서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는 가급적 오른편에 앉아야 좋은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린델발트에서 융프라우요흐로 올라가는 산악열차는 확실히 오른편에 앉는 것이 좋다. 그린델발트 역을 출발한 열차는 갈 지(之) 자로 정주행과 역행을 반복하여 경사면을 내려간 뒤 본격적으로 융프라우요흐로 이어지는 비탈을 가로지른다. 특히 이 융프라우요흐 지역의 선로는 좀 특이한데, 레일 정가운데에 열차의 탈선을 방지하기 위해 견고한 톱니 레일이 추가로 깔려 있다. 그린델발트에서 출발한 열차는 클라이네 샤이덱(Kleine Scheidegg) 역에서 멈추고, 우리는 글라이네 샤이덱 역에서 열차를 갈아탔다.
비가 온 덕분에 오히려 날씨 개인 후 풍경이 훨씬 맑고 깨끗하다. 아쉽게도 왼편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오른편에 앉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는데, 이윽고 어떤 풍경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로 진입한다. 융프라우요흐 지하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것인데, 이윽고 마지막 간이역인 아이거글랫쳐 역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아이거글랫쳐 역은 땅밑에 있는 역인데, 산벽으로 구멍을 내어 빙하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열차는 채 5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간이역에 정차했는데, 승객들이 우르르 내려 전망지점으로 향했다.
아이거글랫쳐 역에서 바라다보이는 알레치 빙하는 융프라우요흐 전망대에 올라서면 더욱 훤히 조망할 수 있다. 맨 처음 융프라우요흐 전망대에 올라서 눈에 들어왔던 것은 묀히(Mönch) 봉우리로, 융프라우(Jungfrau)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다보니 처음에는 묀히를 융프라우로 착각했다. 전망대의 고도가 해발 3,400m를 넘기 때문에 (물론 그린델발트고 기본 고도가 높아 날씨가 쌀쌀하지만..) 한여름에도 불구하고 매우 춥다. 한 커플은 융프라우요흐에 강아지까지 대동(帶同)했는데 허리춤에 걸쳐 있는 강아지가 마냥 귀여웠던 게 기억난다.
가끔 아빠는 주위 경관은 본체만체 하고 높은 산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를 매우 좋아하시는데 (중국 시안에서 화산(華山)에 갔을 때에도 그랬더랬다) 상당히 추운 날씬데도 흡족해 하시니 다행스러웠다. 어떻게 융프라우요흐로 오르는 철길을 뚫을 생각을 19세기 말부터 떠올렸을지 좀처럼 상상이 되질 않는다. 한동안 알레치 빙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빙하(氷河)도 강(河)은 강인지라 유속(流速)이 있다고 하는데 짧은 순간도 포착하지 못하는 인간의 눈으로 알레치 빙하가 드러내는 시간의 흐름을 읽을 방법은 없었다.
전망대에 올라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묀히이고 반대편으로 돌아서 보이는 것이 융프라우다. 날씨가 개었다고는 해도 고도가 높은 지역은 여전히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융프라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그 때문인지 전망대도 묀히 방면이 사람으로 더욱 붐볐다. 어쨌든 나와 아빠는 전망대를 한 바퀴 쭉 돌며 묀히와 융프라우 모두 둘러보았는데, 융프라우가 얼굴을 보이지 않아도 어쩐지 아쉬운 생각을 들지 않았다. 융프라우요흐로 올라오는 길에서 이미 멋진 풍경들을 눈에 담아두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극적으로 바뀐 풍경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인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것이 100%이든 60%이든 내게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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