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산행(with. 불곡산)주제 없는 글/印 2020. 12. 25. 00:39
코로나로 인해 일상에 제약도 많고 바깥 활동을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다보니 답답한 마음도 커지고 하루는 아버지와 겨울산을 다녀왔다. 서울에 있는 산은 웬만큼 다녀보았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산을 가기보다는 서울 근교의 산을 가기로 했다. 온도가 조금 오른 날씨를 골라서 오랜만에 양주를 다녀왔다. 불곡산(佛谷山). 경기도가 넓은 지역이고 이름 모를 크고 작은 산이 많은데, 불곡산이라는 산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전에 이 일대에서는 고대산과 사패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TMI. 구글맵에는 '불국산'으로 나오는데 계곡 곡 자를 써서 불곡산이 맞다)
소요산행 열차를 타고 양주역에서 하차. 양주역에서 북쪽으로 20~30분 정도 걸으면 주내 우체국이 나오고 이어서 양주시청이 나온다. 양주시청 왼편으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불곡산 입구가 있다. 불곡산은 450미터 남짓한 높이인데, 결론적으로 높이는 낮은 편이지만 오르기는 힘든 편이다. 밧줄이나 지지대를 붙잡고서 암벽을 올라야 하는 구간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암릉이 많아서 아기자기하게 볼거리가 많은 산이기도 하다. 또 한가지 좋은 점은, 양주 한복판에 위치한 산이라 높이가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에 올라서면 이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는 점. 이 날의 일정으로는 상봉과 임꺽정봉을 오른 다음 악어바위 방면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조금 오르다가 날씨가 더워서 입고 있던 외투를 배낭에 넣었다. 더 올라가 주위에 나무가 안 보일 즈음이 되니, 외투를 왜 벗었나 싶을 만큼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불었다. 처음에는 정상에 가까워져서 바람이 부나보다 생각했는데,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와서 등산로가 능선 동쪽에 있을 때는 바람이 막혀 다시 따듯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높이가 높지 않은 만큼 정상(상봉; 上峰)에 오르는 데에는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정도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남서쪽 방면을 바라보면 사패산과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이 겹겹이 놓여 있었고 북쪽을 바라보면 가장 멀리에 감악산이 보였다. (모두 다 올라본 산이다.) 날씨가 정말 좋은 날에는 잠실 타워까지 보인다는데, 이날은 미세먼지 때문인지 그리 맑은 날씨는 아니어서 전망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북쪽으로 가까이에는 다음으로 오를 임꺽정봉이 보인다.
상봉을 내려가 다시 짧은 구간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하면 임꺽정봉이 나타나는데, 상봉에 오를 때보다 길이 더 험해서 이번에는 장갑을 꼈다. 이름이 워낙 특이해서 올라간 다음 안내판의 유래를 읽어보니 이 일대가 임꺽정의 태생지라고 하는데 그 일대가 정확히 ‘양주’를 말하는지는 (임꺽정이 황해도에서 충청도까지 신출귀몰했던 인물이기도 하고) 명확하지가 않은 것 같다. 여하간 푸른 소나무가 많아서 이 지역 사람들로부터는 일찍이 청송골(青松-)로 불렸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상마다 키가 낮고 넓게 자라난 소나무가 한겨울에도 서슬퍼런 기세를 뿜고 있었다. 해가 높아지면서 햇빛에 반사된 솔잎들이 바늘처럼 빛났다.
임꺽정봉을 내려와 바람이 잦아들고 햇빛이 드는 벤치에 앉아 가볍게 점심을 먹었다. 컵라면, 인절미, 꿀떡, 커피. 다행히도 무겁게 들고온 보온병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간단한 점심을 마치고 악어바위 행. 악어바위로 가기 위해서는 상봉에서 임꺽정봉까지 오르기 전에 길을 꺾어야 했기 때문에, 다시 상봉 방면으로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조금 이따가 잘 보이지 않는 샛길로 접어들면 악어바위 방면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악어바위를 보기 위해서는 다시 짤다랗게 막다른 길로 들어가야 했다. 악어바위의 아주 특이한 모양새답게 임꺽정봉에서 뻗어나온 악어바위 일대도 길이 매우 가파르고 험준했다.
이 산에는 재치 있는 기암괴석이 많다. 악어바위, 코끼리 바위, 생쥐 바위, 물개 바위, 공깃돌 바위. 펭귄 바위 같은 경우에는 우리나라에 없는 동물로 이름을 지은 것 보니 최근에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심지어 내려가는 길에 쿠션바위라고 해서 소파 등받이처럼 생긴 바위도 있었다. 또 복주머니 바위와 삼단바위처럼 동물이 아닌 사물이나 조형물을 닮은 암석들도 있었다. 삼단바위를 내려다보며 편평한 바위 위에서 동글동글한 귤을 네다섯 개씩 까먹었는데, 삼단 바위는 어떻게 저런 층층으로 된 모습이 되었을까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 이야깃거리들을 나누었다. 악어바위 아래에 놓인 복주머니 바위를 끝으로 하면 이후로 내려가는 길은 아주 순탄하다.
버스정류장이 있는 아파트 방면으로 가는 길에 웬 버려진 군사훈련장이 나타났다. 각개전투장과 야영지를 보니 예전에 훈련 받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훈련받는 게 너무 재미없고 힘들기만 했는데, 지금 떠올려보니 미션처럼 재미있게 했던 것 같고 그립기까지 하다. 기억이란 게 시간이 오래 섞이면 미화되는 모양이다. 유양공단을 왼편으로 끼고 마지막 등산로를 빠져나온 뒤, 흙먼지 털이기 기계 앞에서 신발과 검정색 바지에 공기를 쏘아주었다. 겨울이라 더욱 건조한 날씨였기 때문에 기계가 도움이 되었다. 맞은 편 버스정류장에서 133번 버스를 타고 양주역으로 되돌아 오는 길. 계속 실내에 있다보니 한동안 운동량이 줄어서인지 유난히 다리가 무거웠고, 1호선 히터에서 나오는 훈기에 나른나른 잠이 왔다. 그 길로 집에 돌아와 씻은 다음 책을 잡고 읽는 시늉을 하다가 깊고 짧은 잠에 빠져들었다. [終]
'주제 없는 글 > 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진일기—눈 온 뒤 낙산에서 (0) 2021.01.20 사진일기—성수동 야경 (0) 2021.01.05 누하동으로부터 (0) 2020.11.12 늦가을, 종묘 (0) 2020.11.01 하루 이틀 사흘 (2) 2020.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