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중순, 며칠 동안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날이 있었다. 종종 한 생각에 꽂히면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에 대해, 또 어떤 때는 새로이 시작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며 잠을 설치곤 한다. 2월 중순 내 머리를 꽉 채웠던 것은 혼자임에 대한 절망 같은 것이었다. 어떤 인간 관계로도 끝내 어루만질 수 없을 것 같은 내 안의 밑바닥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닿지 않는 심해에 잠겨 있어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았던 미확인 생물체처럼 마음 속 심연이 예고 없이 떠올랐다. 다만 이 발견에는 기쁨을 대신해 절망이 있었을 뿐이다.
그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던 심연을 비겁하게 외면해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기억을 하나둘 되뇌어 보았다. 또는 그 어두운 구석을 응시하기에는 내가 무심하고 경솔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하지만 나는 그 심연을 마주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알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보고 쩍하니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정체 모를 고독감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가슴이 꽉 죄여왔다. 어느 생각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또 다른 생각에 이르러서는 아득히 무섭고 숨이 막혀 왔다. 차라리 여기가 물러설 곳 없는 나락으로 이어진 벼랑 끝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꼿꼿이 서 있을 수조차 없는 곳에 있었다. 절망의 바다, 절망의 들판에 나는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외곬처럼 생각만 거듭하던 사나흘째 되는 날 억지로나마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고 옛 회사 선배에게도 연락을 해보았다. 약속을 잡아 그들의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누었다. 이들에게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말로 전달할 만큼 생각이 정돈된 것도 아니었다. 친구와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마음이 가라앉고 생각이 수습된 것은 이러저러한 만남이 있은 뒤의 일이었다. 이제서 조금 나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씩 달라 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버티며 살아간다. 삶의 무게는 무겁지만 나만의 것이 무겁지는 않다. 누군가는 제법 무던하게 짐을 이며 누군가는 버겁게 짐을 지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수월하게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누군가는 좀체 더뎌 보이기도 한다. 이들이 짊어진 무게와 버티는 행위는 모두에게 너무나도 뒤죽박죽이어서 차마 경중을 가리기조차 어렵다. 그리고 평등하다. 나를 압도하던 절망감은 결국 누구라도 조금씩 안고 있는 것들이고, 어쩌다 찾아오는 기쁜 순간들도 누구나 느낄 법한 것들이었다. 누군가는 살맛 나서 살아갈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살지 모르고, 이 둘 모두는 누구에게나 절반씩 참이다.
마찬가지로 슬퍼도 기쁜 척이라도 좀 해보라(Quitte à être triste, autant avoir l'air gai.)는 말 역시 반드시 틀리다고 할 수 없다. 웃겨 죽을 것 같지만 슬픈 척을 해야 할 때가 있는 것 역시 삶이기에. 이런 가면 몇 개를 손에 쥐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낯을 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 힘겹고, 그런 내 낯짝에 궁금증을 갖고 유난스럽게 보는 사람들 때문에도 괴로울 때가 있다.
이 이야기에 결말은 없다. 우리 모두 삶에서 가장 첫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듯, 규정된 형태 없이 조금씩 조금씩 잊혀져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존재의 시작과 끝은 생각만큼 명료하지 않고, 나를 에워싼 번민 역시 그 출발과 결말이 불완전하기에, 어느 순간 나를 찾아온 감정과 생각에 너무 많은 무게를 싣는 것은 그 시작과 끝을 분별해 보겠다는 아주 어리석은 생각인지도 모른다.
나의 삶은 언젠가 끝을 맞이하겠지만, 그 끝을 헤아리기에는 내가 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시간이 티끌보다도 너무 작고 보잘것없다. 그 티끌 같은 ‘나’ 안에 이토록 많은 감정과 만남, 사건, 상상이 채워져 있다는 것. 거꾸로 생각하면 이들 감정과 만남, 사건, 상상이라는 세계에 들러붙어 있는 ‘나’라는 티끌. 티끌과 세계를 가르는 한끗을 딛고 올라서 있는 아슬아슬한 삶. 파들파들 공중에 떠오르는 비눗방울처럼 매혹적이지만 엷디엷은,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