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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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혁명(The long revolution)일상/book 2024. 1. 20. 10:17
우리 시대로 가까이 올수록 두 가지 점이 널리 강조되어왔다. 단순한 종류의 유물론에 대한 믿음이 증대하면서 대개는 초자연적 현실을 부정하는 경향이 수반되었고, 이에 따라 예술을 ‘현실의 반영’(모방), 혹은 좀더 세심하게 말하면 ‘현실의 조직’으로 볼 여지도 생겨났다. 반면에 프로이트와 융을 비롯한 새로운 심리학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현실이 있다는 주장을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되풀이해왔다. 인간은 통상적 방법으로는 여기 도달할 수 없는데, 여기가 새로운 과학과 예술의 입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p. 37 커뮤니케이션은 독특한 경험을 공동의 경험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무엇보다도 삶의 권리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살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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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을 본 여자들일상/book 2024. 1. 6. 20:51
자주 찾는 카페에서 감사하게도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달의 뒷면을 본 여자들』. 표지에 묘령(妙齡)의 그림이 그려진 이 책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림이 글을 닮아가고 글이 그림을 닮아가는, 글과 그림 사이에서 새로운 창작행위를 모색하는 형태의 작품이다. 정오가 넘도록 늦잠을 잔 어느날,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상태에 만족스러워하며 무얼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책을 들고 집앞 카페를 찾았다. "보도블록의 요철을 디딜 때마다 전해지는 발바닥의 울렁거림 틈 안쪽 어딘가 새겨지는 굴곡" (p.44 중) 작품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특징은 글 안에 마침표가 없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호흡에 변화를 주는 것은 고작해야 쉼표 정도다. 마침표가 없다고 해서 독서가 숨가쁜 것은 아니다. 종결어미로 끝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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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아가일상/book 2024. 1. 2. 00:28
연기다. 한낱 연기다! 모든 것이 연기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한평생 일했건만, 한평생 뼈 빠지게 일했건만 무슨 성과가 있는가? 한 세대가 각 다음 세대가 와도변하는 것은 없다. 예부터 있던 지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돌아간다. 해는 떴다가 지고 다시 떴다가 지기를 되풀이한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불고 돌고 돌며 다시 돈다. 이리 불고 저리 불며 늘 변덕스럽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들지만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옛날부터 흐르던 곳으로 흐르고 처음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 모든 것이 따분하다. 극도로 따분하다. 아무도 그 의미를 찾지 못한다. 눈에도 따분하고 귀에도 따분하다. —전 1:2~9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수확할 때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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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향기—샤넬 No.5와 레드 모스크바일상/book 2024. 1. 1. 19:11
후각을 통해 역사의 격변기를 들어다본다는 건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보고 싶지 않은 것으로 시선을 돌릴 수는 있지만, 알고 싶지 않은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쉬지 않을 수는 없다. 때문에 때로 후각은 시각보다도 많은 것을 전달한다. 역사와 사회에 관한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말하듯이 후각은 "비본질적으로 인식되어 합리성의 세계에서 추방되었(p.45)"고, 사회과학적 텍스트에서 냄새는 깔끔히 표백되었다. 이 책은 그렇게 도외시되었던 후각에 기반하여 크게 두 축의 이야기를 대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세계사를 새로운 렌즈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한 축에는 자유주의의 세계가, 다른 한 축에는 공산주의의 세계가 있다. 한 축에는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라는 조향사가, 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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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전쟁(1954-1962)일상/book 2023. 12. 28. 10:23
가톨릭의 이런 적극적 행동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레지스탕스의 냄새를 맡게 된다. 알제리전쟁이 발발한 시점은 대독항쟁으로부터 10년도 안 된 시기였고 저항의 정신은 부식되지 않았었다. 프랑스인 다수가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것은 아닐지라도 대독저항이 프랑스 현대사와 지식인의 사고에 미친 영향은 심대하다. 이는 레지스탕스를 도운 민중이 매우 적었다는 사실로도 희석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제리전쟁에 대한 프랑스 교회의 비판은 알제리 자체가 그 원천이었다. 오랫동안 식민지와의 깊은 연관으로 갖가지 경험의 보고(寶庫)가 된 식민지는 교회의 존재를 새삼 되새기게 했다. 전대미문의 세계전쟁 직후에 가톨릭의 신자나 의례가 퇴조하는 상황이 되자 교회는 오히려 민중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식민지인은 민중 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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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冒瀆)일상/book 2023. 10. 23. 09:02
예전에 간쑤성 일대를 여행하면서 눈에 담았던 풍경을 떠올리면서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박완서의 글은 언제 읽어도 좋고, 아낌없이 담긴 티베트의 풍경사진은 활자를 읽는 것만큼이나 공들여 한 페이지를 묵시하게 만든다. 이 책은 원래부터 읽어두려고 일찍이 온라인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인데, 최근 S 누나의 추천을 받아 마침내 결제를 했다. S 누나가 읽고 싶으면 빌려줄 테니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늘 그렇듯 내 책 한 권을 소장하는 게 더 좋다. 노령으로 티베트에 여행을 가 고산증세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여행기를 남긴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느껴지는데, 그 글이 따뜻하고 다감해서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모독(冒瀆)'은 그 사전적 의미가 '말이나 행동으로 더럽혀 욕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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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II일상/book 2023. 10. 9. 11:51
는 작가의 인터뷰를 담은 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다. 는 다큐멘터리를 접하기 전부터 서점 매대에서 눈에 띄는 자리에 진열된 책이었지만, 제목이 지닌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읽기가 꺼려졌다. 내가 아는 그 파칭코라면 과연 그걸 소재로 어떻게 장편 소설을 풀어나가겠느냐는 의구심도 없지 않았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너무 피상적인 나머지, 소설의 전개를 그려볼 상상력이 빈곤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속 카리스마 넘치는 작가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저런 작가의 글이라면 한번 읽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것만 다섯 세대가 등장하기 때문에 조각 같은 에피소드가 방대한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파친코나 재일 교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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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I일상/book 2023. 9. 13. 08:27
"어딜 가든 사람들은 썩었어. 형편없는 사람들이지. 아주 나쁜 사람들을 보고 싶어? 평범한 사람을 상상 이상으로 성공시켜놓으면 돼.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법이거든." -p.74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각자 살 방도를 궁리해야 한다는 것이 조선인들이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었다. 가족을 지켜라, 자기 배를 채워라, 정신 바짝 차리고, 지도자들을 믿지 마라.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세하게 해라. 적응해라. 지극히 간단하지 않은가?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는 애국자들이나 일본 편에 선 재수 없는 조선 놈들이 있는가 하면, 이곳에서나 또 다른 곳에서 그저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