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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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일상/book 2023. 8. 31. 18:20
이 책은 반드시 죽음으로 이야기가 귀결되는 18개의 짤막한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소설 속 죽음은 그 자체로 비참하고 극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서사가 유려하거나 한 것은 아닌데, 등장인물들이 개성이 강하고 미시오네스 지방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서 상당히 몰입감을 느끼며 읽었다. 번역가의 열정이 느껴지기도 했던 책. 그는 깨달았다. 계속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과거의 흔적을 마지막까지 없애버리는 일은 피할 수도 없고 미룰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p.155 죽음.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은 몇 년에 걸쳐, 혹은 몇 달, 몇 주, 며칠에 걸친 준비 끝에 어느 날엔가 우리 차례가 와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 되는 것을 수없이 생각하곤 한다. 그것은 숙명적인 법칙이며 받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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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존재일상/book 2023. 8. 22. 13:08
내가 나의 회한을 가라앉히는 데 사용했던 이 공식은 내 정신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플라톤을 칭송하던 나의 가장 훌륭한 사상으로부터 이상적인 유령을 만들어냈다. 나는 자유분방하고 삐뚤어지고 연약하면서도 내 존재의 영역 안에서 엄격하고 강직한 영혼, 부패할 수 없는 영혼을 발견하고 흡족해했다. 나는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 영원히 사랑받을 존재라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나의 모든 악습과 나의 모든 비참함과 모든 약점이 바로 이 환영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나는 모든 똑똑한 남자들의 꿈이 나를 위해서라도 현실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배신을 모르는 여자를 지속적으로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p.65 나는 그를 상상할 때마다 항상 그의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한 주인공을 떠올렸다. 그는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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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여름일상/book 2023. 8. 5. 12:03
내가 지금 내거는 건 다름 아닌 내 삶이다. 뜨거운 돌의 맛이 나는 삶, 바다의 숨결과 지금 울기 시작하는 매미들로 가득한삶. 미풍은 상쾌하고 하늘은 푸르다. 나는 꾸밈없이 이 삶을 사랑하며, 이 삶에 대해 자유로이 이야기하고 싶다. ……이 태양, 이 바다, 청춘으로 끓어오르는 내 심장, 소금 맛이 나는 내 몸, 노란색과 파란색 속에서 부드러움과 영광이 교차하는이 광활한 배경. 이것들을 정복하기 위해, 내 힘과 능력을 다해야 한다. 이곳의 모든 것이 나를 본연의 나 자신으로 내버려둔다. 나는 나의 어떤 부분도 포기하지 않고, 어떤 가면도 쓰지 않는다. 세상의 온갖 처세술 못지않은 생활의 기술을 다만끈기있게 익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p. 23~24 인간이 되는 것은 늘 쉽지 않다. 순수한 인간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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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일상/book 2023. 7. 30. 10:39
관대한 사람의 세상은 점점 넓어지지만 인색한 사람의 세상은 갈수록 좁아진다. 잠11:24 허식과 허세의 삶은 공허하지만 소박하고 담백한 삶은 충만하다. 잠13:7 지혜는 아름다운 집을 세우지만 미련함이 와서 그 집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잠14:1 어리석은 몽상가는 망상의 세계에서 살고 지혜로운 현실주의자는 발을 땅에 붙이고 산다. 잠14:18 무엇이 옳은지 아는 것은 마음속 깊은 물과 같고 지혜로운 사람은 내면에서 그 샘물을 길어 올린다. 잠20:5 지혜가 있어야 집을 짓고 명철이 있어야 집을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운다. 잠24:3 네 원수가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면 가서 점심을 사 주고 그가 목말라하면 음료수를 가져다주어라. 그는 네 관대함에 깜짝 놀랄 테고 하나님께서 너를 돌봐 주실 것이다. 잠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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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회와 그 적들 I일상/book 2023. 7. 25. 18:32
플라톤의 형상 이론과 국가론은 정치철학에서 어김없이 다뤄지는 주제다. 나 또한 별 다른 의문 없이 흔히 국가에 대한 최초의 고찰로 일컬어지는 플라톤 철학을 기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칼 포퍼의 은 내게 생소하면서도 파격적이다. 칼 포퍼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기치 아래, 플라톤의 역사주의적·자연주의적 사유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칼 포퍼에 따르면 플라톤의 철학은 사회과학에서 지나치게 숭앙(崇仰)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칼 포퍼가 볼 때 플라톤의 국가 철학은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결여하고 있다. 플라톤 철학은 역사주의와 탐미주의, 자연주의 등 과학적 사고와 무관한 방법론에 매몰된 나머지, '변화를 불경한 것으로, 정지를 신성한 것으로' 보는 관점을 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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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니타스(Communitas)일상/book 2023. 7. 19. 00:12
는 오늘날 철학적 논의에서 도외시되고 있는 공동체 개념에 대해 사유하는 책으로, 두려움(홉스)-죄(루소)-법(칸트)-무아지경(하이데거)-경험(바타유)의 크게 다섯 가지 파트로 나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칸트와 하이데거 파트를 굉장히 어렵게 읽었다. 특히 법의 세계로 이어지어는 칸트 파트는 따라가지 못하고 헤매는 바람에 몇 번을 읽고 다시 읽어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이 다섯 꼭지의 논의는 공동체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법을 가지고 있지만, 상이한 공동체 이론을 따로따로 소개한다기보다는 홉스와 대비되는 바타유의 사유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빛깔의 공동체 철학을 스펙트럼처럼 펼쳐보인다고 할 것이다. 가장 먼저 으로 대표되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리바이어던을 구성하는 동력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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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일상/book 2023. 6. 23. 08:52
모처럼 최승자 시인의 수필집을 집어들었다. 최승자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을 읽은 적은 있지만, 수필집을 읽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최승자 시인의 시가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시집을 찾아보는 것보다 수필집이 더 홀가분하게 읽힐 것 같아 이 책을 고른 것도 있다. 손에 꼽을 만큼 시를 읽는 나로서는 아직까지 운율이라든가 압축이라든가 하는 것보다는 줄글이 더 편하기만 하다. 산문집을 포함해 그녀의 시는 대체로 인간 내면의 어둡고 공허한 부분을 다루고 있어서, 수필집도 내용이 무거우려나 궁금했는데 다행히 에 담긴 그녀의 일상은 평범하고 익살스럽기도 하다. 이 책은 부제(副題)가 말하듯이 작가가 아이오와에 가서 다른 3개월 남짓 다른 나라에서 온 작가들과 교류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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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일상/book 2023. 6. 4. 11:13
에서 시몬 베유에 관한 글귀를 발견하고 그녀의 글을 읽어보았다. 은 국내에 번역된 몇 안 되는 그녀의 글 중 하나인데, 메모에 가까운 그녀의 짧은 글들을 엮어놓은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있게끔 글들을 엮어놓았다고는 하지만, 기승전결이 있는 글은 아니라서 소제목을 보고 읽고싶은 부분을 그때그때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 글의 특성상 그녀의 흩어진 생각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책의 제목인 에서 중력은 하강하는 에너지로써 상승하는 에너지인 은총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소개된다. 유한한 인간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하강으로 이끄는 에너지로써 중력과 같은 것들로는 인간의 유한한 상상력, 욕망, 악이 거론된다. 이런 것들은 중력과 같아서 인간과 가까운 곳에서 힘을 미치고 강력한 인력을 지닌다. 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