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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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니타스일상/book 2024. 6. 4. 07:50
베유가 전제하는 것은 ‘주체’와 ‘권리’ 사이에 성립되는 무분별한 관계의 단절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권리의 직접적인 주체가 아니며 스스로 권리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반대로 인간은 의무의 주체다. 그리고 이 의무는 오로지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객관적인 차원의 권리로 변한다. —p.45 일찍이 니체가 주목했던 것처럼, 법적 면역화는 두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가 충족될 때에만 본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첫째, 공통적인 것의 분배가 ‘권력의 실질적인 균형’을 토대로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둘째, 다른 모두에게 불평등한 교환을 강요할 수 있을 만큼 현격한 우위를 점하는 권력이 실재할 때 가능해진다. —p.49 1) 시작 단계에서는 법적인 차원에서 판단할 수 없는 폭력적인 행위가 항상 법적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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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아 비바(Água viva)일상/book 2024. 5. 30. 17:31
나는 갑작스러운 순간들을 눌러 고정시킨다. 스스로의 죽음을 품고 있는 순간들, 탄생을 품고 있는 다른 순간들―나는 변태(變態)하는 순간들을 고정시킨다. 그것들이 죽는 동시에 탄생하며 이어지는 모습 속에는 끔찍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p.18 당신이 나에 대해 알게 될 것은 그림자, 과녁에 명중한 화살의 그림자다. 화살은 내게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나는 아무런 공간도 차지하지 않는 그림자를 헛되이 움켜쥘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무언가를 만들 것이다―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나의 자유다.—p.23 영원: 시작된 적이 없는 모든 것을 위한 말이다. 나의 이 작은, 너무도 한정된 머리는 시작되지도 않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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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일상/book 2024. 4. 20. 11:24
아주 오랜만에 읽은 책이다. 연초 회사 동기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인데 이렇게까지 독서를 길게 끌게 될 줄은 몰랐다. 아직 읽어야 할 페이지가 많이 남아 있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한 문장 몇 구를 갈무리해본다.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 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p.21)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늘 성장통이란 말을 끄집어내게 된다. 그런데 합당한 말인가. 그 말이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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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일상/book 2024. 2. 13. 18:56
Seeing comes before words. The child looks and recognizes before it can speak.―p.7 The past is never there waiting to be discovered, to be recognized for exactly what it is. History always constitutes the relation between a present and its past. Consequently fear of the present leads to mystification of the past. The past is not for living in; it is a well of conclusions from which we draw in 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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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일상/book 2024. 2. 10. 17:32
같은 인간이 엄청나게 죽어가는 걸 흥미진진하게 또는 전후의 잇속에 침 흘리며 관전하는 세상인심을 보면서 우리 민족이 죽어가고 우리의 운명이 엉망진창이 될 때도 남들이 저렇게 재미나게 구경했으려니 하니 새삼스럽게 노엽고, 무더기로 살해당하는 게 전자오락 화면 속의 움직이는 영상이 아니라 제각기의 고유하고 소중한 세계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고 핏줄로 사랑으로 얽히고설킨 가족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줄창 눌어붙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p. 57 어떤 자리에서나 극단적인 편견에 치우친 말일수록 목청이 높다. 극단적인 편견이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걸 나타내는 목소리까지도 우선 배타적이다. 남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배제하려면 제 목청을 높일 수밖에 없다. 남의 생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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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How to do nothing)일상/book 2024. 2. 7. 11:39
기억을 돌이켜 생각해보라.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것을 삶에서 빼앗겼는지, 쓸모없는 슬픔과 어리석은 기쁨, 탐욕스러운 욕망, 사회의 유혹에 얼마나 많은 것을 소진했는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의 계절이 오기도 전에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p.16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절반은 우리의 관심을 도구화하는 디지털 세계의 관심경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다른 무언가에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그 ‘다른 무언가’는 다름 아닌 실제 세계의 시간과 공간이며, 시공간에 다시 연결되는 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서로 관심을 가지고 만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온라인상의 최적화된 삶의 장소 상실에 반대하며, 역사적인 것(이곳에서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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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혁명(The long revolution)일상/book 2024. 1. 20. 10:17
우리 시대로 가까이 올수록 두 가지 점이 널리 강조되어왔다. 단순한 종류의 유물론에 대한 믿음이 증대하면서 대개는 초자연적 현실을 부정하는 경향이 수반되었고, 이에 따라 예술을 ‘현실의 반영’(모방), 혹은 좀더 세심하게 말하면 ‘현실의 조직’으로 볼 여지도 생겨났다. 반면에 프로이트와 융을 비롯한 새로운 심리학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현실이 있다는 주장을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되풀이해왔다. 인간은 통상적 방법으로는 여기 도달할 수 없는데, 여기가 새로운 과학과 예술의 입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p. 37 커뮤니케이션은 독특한 경험을 공동의 경험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무엇보다도 삶의 권리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살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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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을 본 여자들일상/book 2024. 1. 6. 20:51
자주 찾는 카페에서 감사하게도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달의 뒷면을 본 여자들』. 표지에 묘령(妙齡)의 그림이 그려진 이 책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림이 글을 닮아가고 글이 그림을 닮아가는, 글과 그림 사이에서 새로운 창작행위를 모색하는 형태의 작품이다. 정오가 넘도록 늦잠을 잔 어느날,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상태에 만족스러워하며 무얼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책을 들고 집앞 카페를 찾았다. "보도블록의 요철을 디딜 때마다 전해지는 발바닥의 울렁거림 틈 안쪽 어딘가 새겨지는 굴곡" (p.44 중) 작품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특징은 글 안에 마침표가 없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호흡에 변화를 주는 것은 고작해야 쉼표 정도다. 마침표가 없다고 해서 독서가 숨가쁜 것은 아니다. 종결어미로 끝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