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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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일상/book 2023. 5. 29. 10:16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었다. 혼돈이라는 막무가내인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 그것이야말로 우연히 우리를 만든 것이자 언제라도 우리를 파괴할 힘이라고 말이다.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p. 55, 57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p. 128 그리고 네가 말한 그 이야기 말이야. 너무나 소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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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일상/book 2023. 5. 21. 00:07
이놈의 나라가 정녕 무서웠다. 그들이 치가 떨리게 무서운 건 강력한 독재 때문도 막강한 인민군대 때문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완변하고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느냐 말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만고의 진리에 대해. 시민들이 당면한 굶주림의 공포 앞에 양식 대신 예술을 들이대며 즐기기를 강요하는 그들이 어찌 무섭지 않으랴. 차라리 독을 들이댔던들 그보다는 덜 무서웠을 것 같았다. 그건 적어도 인간임을 인정한 연후의 최악의 대접이었으니까. 살의도 인간끼리의 소통이다. 이건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이었다. 어쩌자고 우리 식구는 이런 끔찍한 세상에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까. (p. 65~66) 장독대 옆에 서 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보았다. 목련나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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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일상/book 2023. 5. 14. 10:04
네 근심 하나님의 어깨 위에 올려놓아라 그분께서 네 짐 지고 너를 도우시리라. 선한 이들이 쓰러져 파멸하는 것을, 그분 결코 그대로 두지 않으시리라. [시 55:22-23]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돌아오소서! 주님의 복되고 환한 얼굴빛 비춰 주소서.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받겠나이다. [시 80:19] 흰 구름과 먹구름이 그분을 둘러싸고, 공평과 정의 위에서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진다. 불이 주님 앞에서 환히 빛나니 험준한 바위산 꼭대기에서 타오른다 그분의 번개가 번쩍 세상을 비추니, 깜짝 놀란 땅이 두려워 떤다. 산들이 하나님을 보고는 땅의 주님 앞에서 밀초처럼 녹아내린다. 하늘이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바로잡으실 것임을. 그대로 되는 것을 모두가 보리니, 참으로 영광스럽구나! [시 9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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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9일상/book 2023. 5. 2. 19:37
1894년 갑오경장은 형식이나마 천인(賤人)의 면천 조치를 취했고 이어 동학란이란 거센 바람도 신분제도, 그 오랜 폐습을 완화하는 데 이바지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뿌리 깊은 천인들의 애사(哀事)가 일조일석에 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역인(驛人), 광대, 갖바치, 노비, 무당, 백정 등 이들은 변함없는 천시와 학대를 받는 것이었고, 양반이 상민을 대하는 것 이상으로 상민들은 그들 천민 위에 군림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백정이라면 거의 공포에 가까운 혐오로 대했으며 학대도 가장 격렬했었다. p. 199 “호랑이가 늑대를 잡아먹고 늑대는 고라니를 잡아먹고, 짐승들 세계와 뭐가 다르다 하겠습니까. 그것이 자연의 법이라면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헛된 꿈이지요. 인간이 인간을 다스린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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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일상/book 2023. 4. 22. 10:52
나는 이 관능적인 소설이 말하는 “단순한 열정”은 "기다림(Attente)"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이 "기다림"에 두 가지 행위를 빗댄다. 첫 번째는 소설 속 화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며 경험하는 "기다림"이고, 두 번째는 글을 쓰며 소환되거나 소거되는 감각으로써 "기다림"이다. 어느 행위이든간에 소설 속 "기다림"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실체다. 몸에 각인된 것이고 뇌리에 뿌리박힌 것이다. 작가에게 그 남자를 기다리는 것은 멈출 수 없는 것,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도 멈추는 법을 모르겠다고. («Je ne sais pas si je m’arrêterais.»—p.18) 마치 고삐 풀린 것처럼 그녀는 그 남자에 대한 기다림을 멈추지 못하고, 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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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일상/book 2023. 4. 13. 22:58
《소피의 세계》 이후로 철학 안내서를 읽은지 정말 오랜만이다. 그마저도 개별 철학서들은 더 읽지 않으니 철학 관련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다. 사실 엑기스를 뽑아 놓은 이런 류의 책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 서가에 한동안 머무를 때에도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다가, 작년 연말쯤에서야 책을 샀다. 《소피의 세계》가 어린이의 시선에서 알기 쉽게 철학을 안내한다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현대를 살아가는 어른의 시선에서 이해하기 쉽게 철학으로 안내한다. 맥시멀리스트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우리가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거리를 던진다. 책에 소개되는 철학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여러 지역 여러 시대의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시몬 베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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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일상/book 2023. 3. 19. 11:31
모가지가 긴 초병과 나뭇결이 고운 장롱과 이 조화롭던 윗방이 잃어버린 낙원의 한 장면처럼 가슴 뭉클하게 떠올랐다. 천 년을 내려온 것처럼 안정된 구도에 익숙해진 나의 심미안에 조약한 원색으로 처바른 반닫이는 너무나 생급스러웠다. —p.56 말세의 징후가 도처에 비죽거리고 있었다. 나하고 동갑내기를 멀리 시집보낸 소꿉동무 엄마가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내 나이에 시집을 가다니. 그때 나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그러나 시골에선 조혼이 유행이었다. 극도의 식량난으로 딸 가진 집에선 한 식구라도 덜고 싶은데 정신대 문제까지 겹치니 하루빨리 치우는 게 수였고, 아들 가진 집에선 병정 내보내기 전에 손이라도 받아 놓고 싶어 했으니까. —p.179 개성에 미군이 들어온 건 삼팔선을 잘못 그어서 그렇게 된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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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향수(La Nostalgie heureuse)일상/book 2023. 1. 5. 10:37
C’est un phénomène qui m’arrive souvent, surtout avec les miens: je veux confier quelque chose qui me paraît important et le mécanisme se bloque. Ce n’est pas physique, il me reste de la voix. C’est de nature logique. Je suis assaillié par cette interrogation : « Pourquoi le dirais-je ? » —p. 19~20 Bien plus tard, j’ai découverte que celle-ci était méprisée en Occident, qu’il s’agissait d’une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