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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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일상/book 2020. 9. 7. 23:33
두 권의 책 사이에서 손끝이 허공을 맴돌았다. 『절망』과 『창백한 불꽃』. 모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이다. 『롤리타』를 읽은 뒤로 사놓은 책들인데, 처음에는 『절망』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결국 『창백한 불꽃』을 집어들었다. 『절망』은 정말 절망스러울 때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그런 절망은 찾아오지 않았다. 또는 그런 절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창백한 불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독서를 요구했던 책이다. 머리말에서부터 킨보트라는 인물이 편집과 출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갸우뚱하기도 했고, 나보코프의 장난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크게 두 개의 구성으로 나뉜다. 하나는 킨보트의 절친한 벗인 셰이드가 쓴 총 네 편 1000행 짜리 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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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젊음의 가벼움일상/film 2020. 9. 6. 20:56
다분히 논란의 소지가 있는 영화다. 머리를 식힐 겸 종종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를 찾아서 본다. (+프랑스어도 공부할 겸)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는 으로 처음 접했는데, 이 영화에는 마찬가지로 에서 처음 얼굴을 익혔던 마린 백트라는 여배우가 등장한다. (여담이지만 ‘마린 백트’는 예전에 좋아했던 향수의 이름이기도 하다) 여하간 끝으로 iDMB에 매겨진 평점을 참고하고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오종 특유의 관능미와 은근한 긴장감이 각각의 장면에 잘 스며들어 있다. 이자벨이라는 17세 소녀(마린 백트)는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을 통해 낯선 남자들과 만남을 만들어 나간다. 이 가상세계에서 이자벨은 레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위험한 관계 안에서 화대(花代)를 치르는 이나 이를 받는 이나 윤리의식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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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의 글을 읽고일상/book 2020. 9. 5. 17:52
자크 데리다의 글을 읽고 느낀 점을 남기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길고 어려운 글이었기 때문에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글쓰는 것을 미뤄왔다. 이전에 미셸 푸코와 들뢰즈, 과타리의 글도 일부 읽어봤지만, 프랑스 철학은 참 난해하다. 바로 그 난해하다는 매력(?) 때문에 계속 글을 찾아서 읽는데, 『그라마톨로지』는 그에 비하면 난해한 편도 아닌 것 같다. 프랑스어로 된 원본이더라도 읽기 까다로웠을 것 같은 글이다. 역자도 이전에 한 번 번역했던 것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정리정돈을 했다고 하는데 어마어마한 작업이었을 것 같다. 이 책에는 매우 다양한 인물과 철학이 소개된다. 소쉬르,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 하이데거, 후설, 헤겔, 루소까지. 이밖에도 생소한 언어학자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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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세대일상/book 2020. 8. 28. 00:18
Generation “п” (P세대)피즈뎃(пиздеть) : 시덥잖은 말을 지껄이다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 1985년 고르바초프 취임 이후 추진된 개혁개방정책펩시콜라(пепси-кола) : 코카콜라와 더불어 자유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심벌 매우 괴짜 같은 문체, 난해한 어휘들. 이 책을 읽은 뒤 빅토르 펠레빈이 오늘날 러시아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작가라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느낌이 약간 가미된 것 같기도 하고,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소설은 소련붕괴 이후 러시아 시민들이 직면했던 인지부조화(?)를 다루고 있다. 특히 세계에서 처음으로 인공위성(스푸트니크)을 쏘아올렸던 소련의 기세등등한 옛 영광을 기억하고 있는 구세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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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마톨로지(Grammatologie)일상/book 2020. 8. 23. 00:25
이 제목 아래 어떤 생각을 품든 간에, 언어의 문제는 결코 여러 문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만큼 그 문제가 있는 그대로 가장 다양한 연구들과 그 의도, 방법,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가장 이질적인 담론들의 세계적 지평을 침입한 적은 없었다. ‘언어’라는 낱말의 평가 절하 그 자체, 그 낱말에 부여하는 신용에서 그 어휘의 졸렬함, 헐값에 농락하려는 유혹, 유행에 수동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것, 전위의식(conscience d’avant-garde), 즉 무지, 이 점들 모두가 그 점을 증언한다. ‘언어’라는 기호의 인플레이션은 기호 자체의 인플레이션이며 절대적 인플레이션이자 인플레이션 그 자체이기도 하다. ―p. 41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그 역설은 다음과 같다. 자연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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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燃燒)의 미학 : 결자해지 또는 사필귀정일상/film 2020. 8. 18. 22:55
1. 결자해지(結者解之)이거나 얼마 전 에릭 로메르의 작품을 한 편 더 보았다. 셔츠가 앞뒤로 슬슬 젖을 정도로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에릭 로메르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죄다 수다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외에도 에서 약간 눈여겨볼 점이 있는데, 바로 영화 속 다채로운 색에 대한 부분이다. 해변을 비롯해 자연풍광을 즐겨담은 에릭 로메르가 에서는 파리 근교도시를 배경으로 택했다. 이곳에서 에릭 로메르는 색(色)에 대한 미적 감각을 여과없이 발휘한다. 영화의 배경은 세르지 퐁투아즈(Gergy-Pontoise). 파리의 북동쪽에 위치한 신도시로 일찍이 60년부터 기획되기 시작한 곳이다. 우리나라에 비유하면 1세대 신도시인 분당과 일산 정도가 될 텐데, 이곳 세르지 퐁투아즈는 파리만큼의 북적임은 없지만 공화정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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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 여행일상/book 2020. 8. 15. 23:30
우리는 유전자와 게놈의 개념을 뭉뚱그려 사용한다. 엄밀하게 말해 게놈을 유전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게놈은 33억 개의 염기쌍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극히 일부를 유전자라고 한다. 게놈 중 약 2퍼센트가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데 관여한다. 쉽게 말해 유전자는 우리 인체의 구성요소인 약 30조 개 세포의 계획도인 셈이다. 놀랍게도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유전자의 수는 약 1만 9,000개밖에 안 된다. 반면 단세포 미생물인 아메바는 약 3만 개의 유전자를, 유럽소나무는 5만 개가 넘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런데 생물의 복잡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유전자의 개수가 아니다. 세포핵이 있는 생물인 경우 한 개의 유전자가 다양한 구성요소로 조합될 수 있다. 이 유전자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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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타임일상/coffee 2020. 8. 9. 13:10
# 친구녀석 일하는 데 가서 밥 얻어먹고 커피까지 얻어먹은 날 # 동묘앞역 환승통로에는 종종 더덕냄새가 난다. 보따리를 늘어놓고 부지런히 더덕을 손질하며 행상하는 할머니들. 6호선 환승통로가 새로 지어지던 십수 년 전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열차를 놓칠까봐 급하게 걸어가는데 스카프에 가려진 할머니의 두꺼운 주름이 시야에 들어오더니 가시처럼 마음에 박혔다. 잠깐 마음이 아팠고, 그럼에도 쉼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나 자신에게 얄팍한 위선 같은 걸 느꼈다. 한창 걷다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돌부리에 채인 기분이었다. # 중국산 하늘소가 나무 속을 갉아먹어 죽어나는 국산 나무가 많다고 한다. 얼마전 하늘소를 보며 자연이 회복하는 신호라고 생각했던 게 씁쓸하게 여겨졌다. 무언가에게 해로운 생명체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