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하나의 공간 두 개의 시간일상/film 2020. 7. 13. 23:24
차라리 떠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멀리, 영원히 도망가라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그런 곳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은 길이가 길어질수록 고리가 커지는 사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향 동네는 나폴리와, 나폴리는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는 유럽과, 유럽은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p.22,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中, 엘레나 페란테 "너 그거 알아? 너는 언제나 '사실 '진실'이라는 말을 참 자주 하지. 말할 때도 그렇고 글을 쓸 때도 그래. 아니면 '갑자기'라는 말도 참 자주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심'으로 이야기..
-
플라톤의 위염일상/book 2020. 7. 7. 00:10
모리스 블랑쇼의 『도래할 책』 다음으로 읽은 이 책 역시 문학은 아니다. 이 책은 '오늘날 지성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안토니오 타부키(Antonio Tabucchi)와 베르나르 코망의 대담집이다. 소방관의 은유(隱喩)―화재가 났을 때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은, 첫째 소방관을 부르고, 둘째 현 지자체장이 아닌 후세대를 잘 교육해야 한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논설에 저자가 의문을 제기하며 글이 시작된다―에서부터 이 글이 예상했던 소설이 아니어서 흠칫했고, 그 다음으로는 '지성인'에 대해 논의한다는 점에서 좀 당혹스러웠다. 지성인. 젠체하며 고리타분하게 주제의식을 다루고 있는 건 아닌지,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오늘날 지성인은 무엇인지 여러모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프랑스 출간을 염두에..
-
회색 노트일상/book 2020. 7. 2. 00:05
Tibi! 친한 친구여!Vale et me ama! 작별을 고한다!Dilectissime! 나의 소중한..Amicus amico! 친구여,Tibi eximo, carissime! 너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자크와 다니엘의 풋풋한―정말로 '풋풋하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다^-^―우정을 읽어가면서, 나에게는 유년시절 이런 친구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가톨릭 교계에 권세를 행사하는 유권계급인 앙투안 자크의 집안과 프로테스탄티즘을 표방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지 않은 다니엘의 가정은 겉보기에 확연히 대비된다. 하지만 이들의 치기어린 사랑―사랑이라고 표현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은 파리에서 마르세유로 향할 만큼 생생하고 하나의 지점을 향해 달려간다. 그것은 理想. 파리로 되돌아온 자..
-
도래할 책일상/book 2020. 7. 1. 00:07
처음에는 문학비평서인 줄도 모르고 그저 소설로 알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소설이라 여기고 이라는 제목을 접하면 굉장히 구미가 당긴다. 책은 뱃사람들을 영도(零度; zero degré)로 이끌어가는 세이렌의 이야기와 함께 포문을 연다. 제임스 조이스가 에서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의 그리스 신화를 차용했던 것이 떠오른 이 대목에서 모리스 블량쇼의 글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뒤이어 프루스트의 글에 나타난 시간 관념을 해제(解題)하는 과정에서부터는 건조하고 딱딱한 문학비평 이야기로 넘어간다. 문학비평이라기보다 철학에 가까운 그의 글―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음양(陰陽)의 무한궤도를 연상시키는 그의 사상은 동양적이고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풍긴다―이 실제 영양가가 있든 없든간에 개..
-
두 편의 알프레드 히치콕일상/film 2020. 6. 30. 00:38
요즘처럼 영화 개봉이 지지부진할 때에는, 흥행성이 담보되는 옛 영화들이 재개봉하곤 한다. 하지만 꼭 요즘같은 때가 아니어도,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는 뜸하다가도 잊을 만하면 재개봉을 하곤 했었다. 나도 이야기로만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접했지, 막상 그의 영화를 본 건 정도다. 그러던 중 최근에 그의 작품이 재상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을 보았다. 58년도에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고 이전에 를 흑백으로 봤던 기억이 있어서 도 당연히 흑백영화일 줄 알았는데 풀컬러로 되어 있어서 아주 좋았다. (반면 뒤이어 소개할 는 과 달리 다시 흑백으로 돌아가서 잠깐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사실 에 묘사되는 다양한 소재들―붉은 빛을 발하는 금문교의 풍경, 매들린·주디가 입는 옥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회색정장, 미술관에 걸..
-
시간을 수선(修繕)해 드립니다일상/film 2020. 6. 28. 00:11
기억이 더 가물가물해지기 전에 리뷰를 남겨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맨 처음 떠올랐던 것은 라는 프랑스 영화다. 프랑스 사람들은 시간(le temps)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단지 과거-현재-미래를 이동한다는 의미를 떠나 시간의 흐름을 재해석하는 데에 천부적인 기질이 있는 것 같다―두 영화의 공통점 모두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점들을 엮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두 영화가 차이나는 지점 또한 바로 그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나는데, 는 실제로 불연속적인 시간의 변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반면, 는 아주 철저하게 현재에 천착하고 있다. 에 그려지는 빅토르의 화양연화(花樣年華; la belle époque)는 어디까지나 '연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연출된 가상의 과..
-
영화란 무엇인가일상/book 2020. 6. 27. 00:28
영화보는 것을 좋아하니까 이런 류의 책은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최근에 누벨바그 작품들도 몇 편 보고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도 찾아보면서 영화의 '기술적인 면'과 '철학적인 면'을 동시에 다루는 책을 찾아보곤 했다. 이 책은 꽤 오랫동안 가방에 넣고 다녔던 책인데, 막상 알프레도 히치콕도 훑지 않을 만큼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영화까지만 다루고 있다. 또한 저자가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인 만큼, 대체로 유럽영화―그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 영화―를 주로 다루는데 유럽 영화들을 좋아하는 만큼 (비록 아는 영화들은 아니더라도) 거리감이 드는 제재(題材)는 아니었다. 정작 독서를 가로막았던 것은, 옮긴이가 역자의 말을 빌려 번역의 어려움에 관해 몇 번 언급을 한 것처럼, 번역된 문장들이 너무 퍽퍽하고 심지어 오탈..
-
咖啡時間일상/coffee 2020. 6. 25. 11:37
궁(宮)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과의 전란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던 경복궁은 아직도 상흔이 가시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경복궁을 대신해 정무(政務)가 이루어졌던 동궐(東闕; 창덕궁과 창경궁)은 비록 화마는 피해갔지만 궁을 동물원으로 꾸미겠다는 일제의 농간까지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사실 외국에 여행을 가도 궁은 딱히 흥미로운 대상이 아니다. 마드리드를 여행할 때 레알 왕궁을 간 적이 있다. 처음에는 이베리아 반도 특유의 강렬한 햇살에 지글지글 안으로 타들어가는 듯한 건물의 백색 외관에 압도되었다. 안에는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작품에서부터 날렵한 금제(金製) 더듬이가 달린 일본갑옷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다양한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치스러움과 온갖 세속적 상징들이 생생하게 와닿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