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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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일상/film 2020. 4. 26. 23:56
는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무능한 통치자가 보여주는 히스테릭한 면모가 매력적인 영상 안에 아주 효과적으로 그려진 영화다. 또한 역시 권할 만한 뛰어난 영화다. 묻힐 뻔했던 과거의 사건에서 촉발된 아슬아슬한 위기감이 주인공의 위선과 맞물려 살벌하게 전개되는 영화다. 한편 역시 매력적인 영화다. 행동과 언어가 유리(遊離)된 인물들은 희한한 시스템을 쌓아올린 후 서서히 붕괴해간다. 또한 는 어떠한가? 제약된 공간 안에서 사랑이라는 자원을 두고 벌이는 남녀들간의 갈등상황은 그 모티브만으로도 충분히 기발하다. 야근 후 곧바로 잠을 청하기 싫었던 어느 하루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를 뒤적이다 아이튠즈 스토어에서 라는 작품을 발견했다. 그리고 4.99 달러를 결제한 뒤 시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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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매일상/book 2020. 4. 25. 23:00
자유가 필요악이라면, 그리고 그 자유를 매순간 낭비하고 있다면,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착각이라면. 근사한 책표지만큼이나 모든 문장을 통째로 머릿속에 새기고 싶은 책. ……그것이 동물과 인간의 차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루시는 상황에 따라 극도로 맹렬하게 변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미동조차 않은 채 예의 바르고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 인간은 지나치게 연극적인 존재라 열정도 준비하고 연습해야 한다. 그렇기에 인간 생의 절반은 모호하고 격렬한 가장(假裝)이다.―p. 27~28 하지만 루시의 가장 눈에 띄는 아름다움은 표정이었다. 작은 불꽃같아서 관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깜빡거리지 않았고 환하거나 따뜻함도 없었다. 욕구나 소명에 인생의 모든 순간을 집중하는 기운 넘치는 남자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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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북유럽 영화일상/film 2020. 4. 17. 21:49
"What if you go there and discover there is no God?" 북유럽 영화로 묶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설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북유럽 영화로 묶어보았다. 실제로 중부 유럽이라는 것 자체가 지리적으로 경계가 모호하기도 하고 말이다. 폴란드 영화감독 파벨 파블리코프스키의 작품은 로 처음 접했는데, 흑백으로 촬영된 점과 가로:세로=1.2:1 비율로 된 화면을 쓴다는 것이 서로 공통적이다. 뿐만 아니라 소재도 비슷하고 '선율'이 가득한 화면도 닮았다. 가 냉전 속에서 세파에 휩쓸려 난파당하는 한 연인의 사랑을 다룬다면, 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부모님의 족적을 따라가는 한 수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에서는 두 연인의 사랑을 통해 유럽대륙에 거칠게 드리워진 육중한 철의 장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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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일상/book 2020. 4. 13. 17:52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 영화 에 은희가 교습소의 선생님에게 건넸던 책이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헤르만 헤세의 서술방식이 조금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헤르만 헤세는 단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읽어보았던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손으로 꼽아보다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데미안」,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서」 모두 좋은 책들이지만, 헤르만 헤세의 세계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작품이 아닌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을 학교 다닐 때 도서관에서 읽었더랬다. 헤르만 헤세의 서적이 꽂힌 구역에서 뜬금없이 집었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인물이 명징하게 반대항을 이루며 음과 양처럼 서로를 휘감고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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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원소 이야기일상/book 2020. 4. 12. 03:22
18세기 말 화학을 혁신했던 라부아지에의 업적 중 하나는 홑원소물질로서의 원소, 즉 분리된 형태의 원소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화학이 짊어졌던 과도한 형이상학적 짐을 덜어냄으로써 화학을 발전시키려는 의도였고 실제 위대한 진전이었다. 라부아지에에 따르면 원소란 어떤 화합물의 구성 성분을 낱낱이 분리했을 때 맨 마지막에 남는 물질이었다. 라부아지에가 정말로 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원소 개념을 없애려고 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실제로 분리할 수 있는 원소보다 추상적 의미의 원소가 덜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추상적 의미의 원소 개념이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었으니, 그 개념의 지위를 격상시키자고 제안했던 화학자 중 하나가 바로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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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게리 올드만일상/film 2020. 4. 11. 00:20
누군가가 요새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져 산다는 말을 하던데, 나는 잠시 넷플릭스 알고리즘에 빠져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언제 어떻게 해서 이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의 작품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넷플릭스의 무료체험기간이 만료되는 날 본 마지막 영화다. 이게 분명 한국어로 자막이 달려 있기는 한데, 제대로 이해를 한 게 맞는지 모르겠다.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첩보전을 벌이는 영국신사들의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다. 혹시나 이게 실화를 기반으로 한 거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영화를 감상했는데, 감상한 뒤에 찾아보니 존 르 카르레의 첩보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한다. 전체적인 정보를 종합해 볼 때, 는 책보다 더 책처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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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타자일상/book 2020. 4. 8. 21:12
레비나스의 글은 처음이지만 이런 글들을 읽으며 삶에 서 큰 용기를 얻는다. 철학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허풍잡는 소리이기는 하지만 이래서 철학책을 찾는가보다 싶다.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더라도 하나의 글덩어리를 음미한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활자는 크고 행은 여유가 있어 좋다. 아주 단출한 책인데 내용은 단출하지가 않다. ‘사유하는 존재서로의 인간’이라는 데카르트의 명제 이후 오늘날 현대철학은 인간 주체의 죽음을 고하기에 이르렀다고 역자는 잠시 짚고 넘어간다. 단, 레비나스의 글을 읽으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느꼈다. 존재의 부재가 단지 물리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간은 존재에 가해지는 부재(不在) ―존재의 현현과 익명성 자체가 되어버린 존재 ―의 그늘 아래 인식의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