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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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월송정(越松亭)여행/2023 봄비 안동 2023. 5. 13. 05:15
만휴정에 이어 내가 향한 곳은 다른 곳도 아닌 월송정(越松亭)이다. 월송정에 대해서는 많은 부연이 필요하지 않다. 싱그러운 소나무와 바다가 있는 곳. 그리고 그 완충지대에 봉긋 솟아오른 둔덕, 둔덕의 곡선을 어지럽히는 첨예한 정자. 비가 내리는 월송정을 가보고 싶었고 나는 당진영덕고속도로를 달려 그곳에 도착했다. 불과 5개월 전쯤 이곳을 찾았기 때문에 기억 속 낯익은 진입로와 주차장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다. 사철 푸른 소나무가 펼쳐진 이곳의 풍경이 겨울과 크게 달라졌을 건 없다. 겨울에도 그랬듯이 이곳의 금강송들은 싱그러운 붉은 몸통 위로 진녹의 침엽을 하늘로 뻗어올리고 있었다. 먹구름을 떠받치는 덩치 큰 소나무들을 올려다보면 좀전까지 진녹의 빛깔을 띄었던 잎사귀들은 이내 빛을 등진 시커먼 응달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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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동산, 바람을 모으는 곳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4. 3. 18:27
영양에 왔으니 영양이 궁금하다. 그렇게 해서 영덕을 가기에 앞서 들른 곳이 맹동산 일대에 자리잡은 영양 풍력발전소다. 숙소가 위치한 입암면으로부터 직선거리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풍력발전단지까지 가는 데 한 시간 남짓 시간이 걸렸다. 이 일대는 사과 농사가 잘 되는지 어딜 가도 사과 나무가 흔하다. 나이가 어린 사과나무들은 한창 손질을 받고 있는 듯 모양이 제각각이고, 다 자란 사과나무들은 여러 개의 와인잔을 찍어낸듯이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겨울 산책」에서 데이비드 소로가 찬탄했던 개성 있는 야생사과와는 거리가 멀다. 저마다 재능이 다른 아이들이 평범한 어른이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고장에 온 이상, 이날 오후 영덕에서 청송으로 가는 길에 국도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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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盈德)은 바다다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3. 29. 01:17
국도를 운전하는 것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영양에는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 하더라도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잡아먹는다. 맹동산 풍력발전단지를 거쳐 영덕으로 가는 데는 도합 두 시간 가량이 걸렸다. 국도 옆으로는 이 지역의 특산품인 사과나무의 맨들맨들한 나뭇가지마다 한낮의 뙤약볕이 흐릿하게 부딪친다. 병에 걸린 손가락처럼 마디가 굵은 나뭇가지에는 열매도 잎사귀도 남아 있지 않다. 국도를 운전할 때는 이런 크고 작은 풍경들을 마주하는 것이 정겹다. 주마간산으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리 일행은 강구항으로 곧장 가는 대신 영덕군의 북쪽에 자리잡은 오보리 쪽으로 빠져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여기에는 어쩐지 번화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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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英陽)에 머물며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3. 5. 03:20
2월초 진관동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것이, 2월말이 되면 무대를 영양으로 옮긴다. 조금씩 위치가 다르기는 하지만 경상북도에는 유난히 ‘영’이라는 말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영양, 영덕, 영주, 영천. 별 건 아니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이 네 곳 모두 다 다른 한자를 쓴다는 점이다. 英陽, 盈德, 榮州, 永川. 직접 차를 몰아 도착했던 영양은 원래 지난해 안동 일대를 여행하면서 한 번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서울과 영양을 오가는 버스가 있어도 자동차가 아니면 접근하기 힘든 곳이다. 인구도 전국 지자체 가운데 울릉군 다음으로 가장 작은 곳) 당시에 영양에 와보고 싶었던 이유는 맹동산 일대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장관이라는 글을 인터넷 어딘가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궁화호를 타고 안동에 다다랐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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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다음 행선지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9. 12. 20:01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안동 여행에 관한 기록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영주역에서 안동역으로 온 이후 나는 곧장 안동 신시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오갈 때 시장골목을 겉으로만 봤었는데, 실제 시장에 이르니 휴무일인가 싶을 정도로 골목이 한산했다. 정확하게는 신시장에 인접한 청년몰이라는 곳인데, 전주에 있던 청년몰과 마찬가지로 청년들이 소규모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찾은 곳은 치킨을 파는 곳. 간단히 강정이라도 먹고 요기를 하려고 했다. 안동 시내에 있는 유일한 비프랜차이즈 치킨집이었다. 도착해서 보니 배달을 중심으로 하는 곳이라 매장이 크지 않았고, 그마저도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 협소했다. 가게 주인도 방문객을 보고 놀란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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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날. 부석사(浮石寺)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9. 9. 13:13
버스에서 내린 종점 회차지에서부터 부석사의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유원지 같은 느낌이었다. 주차자에는 차가 거의 없고 식당들은 모조리 문을 닫았다. 그나마 부석사를 찾은 몇몇 방문객만이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지만 갈곳을 헤매는 행락객 같기도 하다. 코로나에 이례적으로 긴 장마까지 가세해 원래 움직이던 모든 것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정지화면을 보는 것 같은 이때의 광경은 이날 저녁에 찾은 청년몰(안동의 신시장 일부)에서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일주문을 통과해 조금 더 걸으면 예의 당간지주가 나온다. 소수서원에 남아 있던 당간지주가 옛 사찰의 흔적을 증언했듯이, 천왕문을 앞두고 대칭형의 당간지주가 왼편의 우거진 나무 사이로 살짝 모습을 숨기고 있다. 대단한 기계도 없던 시절에 이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