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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가을(Deutscher Herbst)일상/film 2023. 4. 10. 21:57
한 여자에게 인생을 저당잡힌 남자와 그 남자의 인생을 구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마리아라는 여자의 이야기. 영화가 끝난 뒤 시네토크가 따로 없었다면 단순한 치정극, 인생역정 스토리 정도로 이해했을 것 같다. 시네토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 영화의 역사적 맥락들이 각 장면마다 따라 붙기 시작한다. 일단 영화의 도입부에 아돌프 히틀러의 초상이 나타나는 것과 영화의 종반부에 헬무트 슈미트의 초상이 수미상관으로 나타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볼 수 있다.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 두 인물의 대비는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독일 영년(零年)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전후 폐허가 된 독일. 독일 역사의 시곗바늘은 원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광인의 출현은 독일 전역을 전쟁으로 내몰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쟁이 종료된 시점에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전쟁을 목격하고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독일사람들은 양차 대전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감독 파스빈더를 포함한 전후 세대는 전쟁 직후 궁핍하고 피폐한 시기를 경험했으면서도 그러한 폐허의 원인이 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온 세대다. 아무도 역사적 원죄를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 숨통이 트인 것은 68 혁명 이후 이른바 '독일의 가을'이라는 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다. 70년대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유럽도 아닌 미국에서 처음 제작되고 독일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한다.
한편 대학가에 번진 학생운동과 적군파(RAF; Rote Armee Fraktion)라는 급진적 테러리즘 조직의 등장은 전후 서독 사회에 자라온 사회적 부조리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전경련 회장인 한스 슐라이어의 피살 사건, 잇따른 RAF 구성원의 의문사는 독일 사회에 파장을 몰고 왔고, 독일 사회가 그간 쉬쉬해 왔던 역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적 혼란의 절정을 이룬 이른바 '독일의 가을'이 1977년. 그로부터 불과 13년이 지나 서독과 동독이 통일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역사는 참 아이러니한 것이다. 이념적 대립이 물리적 충돌로 표출되었던 시점이 채 사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화합하는 시점으로 연결된 것이다.
역사적 맥락을 참작하면서 영화를 다시 떠올려보면, 영화의 마지막에서 마리아의 죽음은 감독의 역사적인 자각과 독일 사회의 음울한 전망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그러한 우울한 자성 위에서 독일은 동서 통일이라는 또 다른 역사적 장면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의 가을'이라고 총칭되었던 일련의 영화 실험들은 단순한 회의주의를 넘어 관객들로 하여금 독일 역사에 대해 카타르시스를 발견하게 했고,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치열하게 모색했다고 평해도 되지 않을까. [E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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