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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산(Le otto montagne)일상/film 2023. 10. 25. 08:56
무언가에 꽂히면 반드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상, 미루고 미루던 영화 <여덟 개의 산>을 마침내 영화관에서 관람했다. 요 몇 주간 잔잔한 영화를 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고 느끼던 차였다. 잔잔한 영화라고 하면 어쩐지 프랑스 영화가 먼저 떠오르는 건 일종의 선입견일 텐데, 언제부터인가 미국 영화는 상업성 짙은 영화이고 미국 이외 지역의 영화는 재미는 덜해도 의미를 곱씹어볼 만한 영화라는 편견을 갖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영화 중에 잔잔한 영화가 없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닌데, 그밖의 나라, 특히 라틴계 유럽 국가들의 영화들의 연출이 더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는 건 결국 개인의 취향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이탈리아 영화의 제목이 <여덟 개의 산>, 그러니까 제목만으로 어쩐지 구미를 당겼던 이름이다.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여덟 개의 산을 등반하는 이야기였다면 진부했을 텐데, 이 제목은 사실 네팔 신화에서 따온 것이다. 아마도 불교의 세계관인 구산팔해(九山八海)—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여덟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동심원처럼 세상을 이룬다는 관념—에서 따온 것으로, 수미산을 뺀 나머지 여덟 개의 산을 유랑한다는 의미이자, 삶을 헤아리기 위해 방황한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이야기의 출발점이 1984년이다보니 의도적으로 아카데미 비율(1.37:1)을 사용하는데,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화면비율이어서 답답한 느낌도 들고, 공간적 배경이 알프스인만큼 횡으로 길게 늘어선 산봉우리들이 잘 담길까 싶기도 했다. 화면비율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적어도 알프스의 풍경과 사람의 모습만큼은 아름답게 담긴 영화였다. 지붕 위로 올라간 염소와 황량한 돌무지를 가로지르는 아이벡스의 풍경은 스위스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는 피에트로와 브루노의 성장기로, 나는 주인공 피에트로에 많이 감정이입을 했다. 어른이 되며 산사람이 되길 택한 브루노와 달리,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피에트로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동시에 부채 의식을 지닌다. 그리고 피에트로가 결국 답을 구하는 곳도 산이다. 네팔의 히말라야 산줄기에서 그는 자신이 삶이 끝내 여덟 개의 산을 배회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탐색을 멈출 수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거란 걸 깨닫는다. 아버지가 걸었던 행로를 되짚으며 그는 아직 아이같은 마음으로 어른이 되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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