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은 왕자의 난 이후로 조선시대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해왔고…” <동궐도> 앞에 서서 기계적으로 설명을 덧붙인다. 주말이 되면 박물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 시절, 도슨트를 희망하는 관람객이 도착하면 <동궐도> 앞에서 으레 ‘조선시대 사실상의 법궁’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문장을 약간씩만 표현을 달리하며 줄줄 읊곤 했었다.
하루는 평일에 생긴 휴일을 이용해 창덕궁에 다녀왔다. 평일이어서 한산하게 둘러볼 수 있겠거니 생각했건만, 알록달록 개량된 한복으로 차려 입은 외국인들로 매표소가 인산인해다. 벌써부터 질리는 풍경이지만 그렇다고 도착한 발걸음을 돌리기도 아쉬워 입장료를 지불하고 돈의문을 통과한다. 마지막으로 창덕궁을 찾은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지라, 생전 처음으로 창덕궁을 찾은 것처럼 모든 풍경이 새롭게만 보인다. 분명한 차이라고 한다면 마지막으로 창덕궁을 찾았을 때에 비해 지금은 내국인보다 외국인들이 더 눈에 띌만큼 서울이 거대한 관광 도시가 되었다는 점이다.
서울이라는 공간은 참 특이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조선시대 가장 먼저 지어진 법궁인 경복궁은 오늘날에는 광화문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며 서울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광화문의 옛스러움과 고즈넉함을 좋아한다. 김영삼 정부의 결단이 있기 전까지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복원된 월대 위로 남녀노소 사진을 남기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런데 막상 경복궁에 들어가보면 근정전과 경회루 정도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건물이 없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원래의 자취를 잃어간 경복궁은 한 왕조의 쇠락을 상징하지만, 그와 대비되게 오늘날 그 앞에는 각국 대사관이며 대기업 본사와 청사들이 위용을 갖추고 있다.
반면 세종대로에서 오른 방면으로 어슷하게 빗겨난 위치에 있는 창덕궁은 조선시대 대부분의 정사가 이루어지던 곳. 종로3가와 종로5가 사이의 어디쯤, 혜화동과 종묘의 중간. 여전히 서울 사대문 안이기는 하지만, 광화문과는 분위기가 퍽 다르다. 60~70년대까지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살았다는 세운 상가는 해묵은 건물이 되어 ‘다시 세운 상가’로 개축되었고, 낙원상가 옆 골목은 노포들과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혼종적으로 늘어서 있다. 사실 나는 일관되지 않은 탑골공원과 인사동, 광장시장 일대의 풍경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 상권의 배후에는 창덕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는 번듯한 명함을 달고 들어서 있다. 쾌청한 날에는 첩첩으로 이어진 북악산과 북한산 자락이 종로4가의 꾀죄죄한 복층 건물들 너머로 청량한 빛을 발한다.
서울의 중핵(中核)은 그렇게 묘한 대칭을 이루며 분열되어 있다. 분열되어 있는 듯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광화문에서 흥인지문으로 이어지는 종로, 파이낸스센터에서 광희문으로 이어지는 청계천은 두 법궁이 품고 있는 이질적인 풍경을 하나로 묶어준다. 동과 서, 서와 동, 서울이라는 진자는 조금씩 파동하면서 도시 전체에 변주를 불어넣는다. 봄이 되면 부활절을 맞아 명동성당이, 초파일에는 조계사 일대가 분주해진다. 동쪽으로는 약령시장, 황학시장, 동대문시장의 오래된 풍경이, 서쪽으로는 신촌과 홍대를 거쳐 한강에 다다르는 젊은이들의 활기. 파동은 동서에 그치지 않고 남으로도 뻗어나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는 청계천 이남 지역, 그러니까 명동과 충무로에까지 넘치고 이내 남산을 휘감는다.
점점 더 수고로운 일들이 싫어지는 요즈음이다. 나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령 뚜벅이 여행이 점점 엄두가 나지 않는 식이다. 새로운 장소를 찾는 일 또한 부담스럽게만 느껴진다. 건강검진을 핑계삼아 빈둥빈둥 한가히 시간을 보낸 하루, 나는 그렇게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을 좀 더 가까이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