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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글리 허니(Ugly Honey)일상/film 2016. 12. 7. 16:37
<아메리칸 허니/드라마/안드레아 아놀드/스타(사샤 레인), 제이크(샤이아 라보프), 크리스탈(라일리 코프)/162>
star[star] n. a person who is preeminent in a particular field
최근 읽고 있는 책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다. 똑같은 신대륙이지만 서로 다른 경로를 걸어간 북미와 남미의 역사를 비교해가며 읽고 있는 중이다. 영화를 보면서 어쩐 일인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함께 올해 초 읽은 <미국사>가 오버랩되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미국사회에서 고착화된 빈곤, 점점 더 깊어가는 빈부의 격차다. 그럼으로써 "아메리칸 드림"의 허황됨을 고발한다. 부가 차고 넘치는 사람은 부를 주체하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반면, 가난한 사람은 빈곤의 수렁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앞선 두 권의 책이 동시에 떠올랐던 건, 아마도 전자가 미국이라면 후자는 남아메리카로 느껴졌던 것 때문일까. 문제는 이 두 개의 세계가 '미국'이라는 한 국가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를 주체하지 못하는 세계와, 빈곤에 길들여진 세계가 '성조기' 아래 '미국'이라는 하나의 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초반에는 좀 단조롭다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영화였다.
영화에는 유달리 '성조기'가 많이 등장한다. 주택가에 내걸린 성조기, 열차에 칠해진 성조기, '제이크'가 상사인 '크리스탈'에게 오일을 바를 때 '크리스탈'의 몸을 간신히 가린 비키니의 프린팅 역시 성조기다. 파란 바탕에 박힌 쉰하나의 별, 빨간 스트라이프. 미국인이 자랑으로 삼는 성조기다. 그러나 펄럭이는 성조기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초라하다. 잡지 외판업을 운영하는 '크리스탈'은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모아 이 도시 저 도시로 전전한다. 청소년들은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처럼 거침없고 욕설 섞인 대화에서 유대감을 느낀다. 보는 이로써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장면도 적지 않다. 성조기가 대표하는 미국 사회가 어떤지를 감독은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런 역설적인 영화에 매우 여러 차례 등장한다. 패러독스를 영화에 담는 방식이 정말 좋았다. 패러독스를 몇 가지 키워드로 추려보려고 한다.
#스타
여주인공의 이름이 '스타'다. 예쁜 이름이다. 갓 19살이 된 그녀는 어느 마트에서 '제이크'와 우연히 마주친다. 그가 실수로 흘리고 간 휴대폰을 전하는 과정에서 '스타'와 '제이크'는 말을 섞게 된다. 이때 '제이크'의 휴대폰 케이스는 반짝이는 별(스타)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는 마치 '스타'와 '제이크'의 만남이 필연적인 것처럼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이 가진 의미가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스타'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죽은 별(Dead Star)'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 그녀는 아름답지만 (그리고 그녀의 이름도 예쁘지만) 그녀의 삶이 아름답고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외판업 사장인 '크리스탈'의 이름에서도 의미를 이끌어내봤는데, 여기에는 패러독스가 숨어 있지 않다. 이 여자는 말 그대로 '크리스탈'이다. 돈이면 문제될 게 없는 그녀에게 값나가는 '크리스탈'은 꼭 어울리는 이름이다.
#캔자스
이 방랑단이 외판을 위해 처음으로 향하는 도시가 '캔자스시티'다. '캔자스'는 '오즈의 마법사'와 '슈퍼맨'의 고장, 정의가 승리하고 모든 일이 사필귀정될 것만 같은 이미지의 고장이다. 그러나 방란단이 이곳에 온 목적은 부촌에 내려 최대한 잡지를 팔아보려는 것. 캔자스시티는 대형프랜차이즈 업체의 현란한 네온사인으로 이들을 반긴다.
이때 신참인 '스타'에게 외판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제이크'가 동행하는데, 부촌의 어느 크리스천 가정을 방문한다. 부인은 두 방랑객의 달갑게 여기지 않지만, '제이크'의 감언이설로 이들을 집에 들이고 물을 대접한다. 이때 '스타'가 부인의 위선적인 태도에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려 한다는 '제이크'의 말에 부인은 잠시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백인남성이 주류인 정치학계에서 행색조차 남루한 이방인이 '대학'이니 '정치학'이니 떠들어대는 것이 가소롭다는 듯이. '스타'는 마치 이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의 주위를 휩싼 '위선'을 감지한 듯하다.
그러나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듯 외판원을 대하던 부인은 정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던가. 그녀가 이루고 있는 가정은 '스타'와 '제이크'가 사는 세계와 달리 점잖고 교양있던가. 그녀의 딸은 부인과 '제이크'가 대화하는 내내, 정원에서 친구들과 '제이크'를 유혹하는 듯한 동작과 함께 점점 더 선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들이 쌓아올린 높디 높은 부(富)의 성(城)에서든, 방랑하는 청소년들이 전전하는 허름한 여관에서든, 사람의 존엄한 가치는 발견되지 않는다.
#종교
민감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화에서는 (비중있게는 아니더라도)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본인이 기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부유한 사람들, CCM의 장단에 맞춰 흥얼대는 노인들을 '제이크'는 조롱하고 비웃는다. 그들의 집에서 눈에 띄지 않는 귀금속을 훔치고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그는 '신'이 그 자신을 버렸고 자신과는 무관한 존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특정 종교에 대한 편견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 새, 벌레, 들짐승
이 부분이 좀 해석의 여지가 있다. 아직도 확실히 의미를 이끌어내지 못하겠다. 영화에는 '인물' 뿐만 아니라, '동물'을 담은 화면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마친 실제 시선이 흘러가듯 촬영한 이러한 사소한 장면들이 개인적으로 무척 좋았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들이다 : 음식 부스러기에 꼬인 벌레들, 수영장에 빠져 둥둥 떠 있는 벌, 창문에 부딪힐 뿐 바깥으로 나갈 길을 찾지 못하는 날파리, 메스칼(술의 일종)에 담긴 애벌레 등등. 또한 전신주의 전깃줄에 앉은 제비, 저멀리 하늘 위로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 그리고 애완용으로 기르는 날다람쥐와 개, '스타'의 코앞을 스쳐지나가는 곰(<레버넌트>보다 훨씬 잘 표현되었다,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장면이 아닐지..), 트레일러에 실려가는 소, 정원을 누비는 말들. 끝으로 늑대.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화면들을 넣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면에서는 '스타'가 별볼일 없는 벌레들에 자신을 이입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날다람쥐와 개를 옆에 둠으로써 위안을 얻는 것 같기도 했다. '늑대'의 경우, '스타'와 '제이크'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볼 수도 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거북이와 반딧불이 좋았다. 물속으로 사라진 거북이와 달리 물속에 온몸을 담은 '스타'는 잠시후 수면을 박차고 올라온다. 그리고 강력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이 와중에 모닥불을 에워싸고 광란의 춤을 추는 방랑청소년(?)들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여튼..이쯤이면 육해공의 모든 동물들이 다 동원된 것 같다.
So...?! What's your dream?
'스타'에게 꿈을 꾼다는 것은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우연히 동승한 트레일러 기사가 그녀에게 꿈을 묻자 그녀는 답을 '좋은 집'에 사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과연 그녀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캔자스 시티와 텍사스의 석유지대를 거쳐 다음으로 향한 곳은 매우 빈곤한 지역이다. '크리스탈'은 청소년들에게 '그들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할 것'을 주문한다. '스타'가 방문한 어느 가정은, 이 '빈곤'이라는 것이 얼마나 박멸하기 힘들며, '꿈'을 어떤 식으로 좀먹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마약에 절어 있는 엄마,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는 아이들, 음산한 가사를 읊은 꼬마에 이르기까지.
과연 이 모든 것을 뚫고 그녀는 그녀의 인색에서 '자그마한 별'로 빛날 수 있을까. 그녀는 '제이크'와 서로의 꿈을 이루기 위한 생각으로 1,000 달러를 거머쥘 생각으로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결과를 위해서라면 '수단'의 정당성이나 도덕성이 쉽게 간과되는 세상.
마지막 장면에서 희망적인 느낌을 읽어내기는 했지만,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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