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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살찐 고양이에 대처하는 자세주제 있는 글/<Portada> 2017. 1. 15. 22:36
살찐 고양이(Fat Cat) : 특권적 혜택을 누리는 부유한 자본가를 조롱하는 표현
미국이랑 별 인연은 없지만, 딱 한 번 북서부를 여행한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인지 시애틀이나 포틀랜드와 관련된 뉴스가 나오면 그냥 지나칠 것도 다시 한 번 들여다 본다. 이번에 내 관심을 끈 이슈는 작년 12월 포틀랜드 시의회에서 통과된 CEO 과세 법안에 관한 기사였다. 일전에 미국 북서부 여행기를 쓰면서 워싱턴 주와 오리건 주는 미국 내에서도 이단아적인 느낌이 드는 지역이라 썼던 것 같은데, 이번에 포틀랜드 시의회에서 통과시켰다는 법안 또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큰 틀에서 봤을 때는 신선하다. 오바마 케어를 도입하는 것조차도 논란이 많았을 만큼, 사회안정망과 증세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은 미국사회에서, 포틀랜드에서 신설된 CEO 과세 법안은 그와 정반대의 기조(基調)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신설된 법안이란 게 무엇인지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 CEO-사원임금 중간값의 격차가 100배 넘는 기업에 대해 영업허가세(기업에 대한 지방세의 하나)를 10% 추가 부과한다
2. CEO-사원임금 중간값의 격차가 250배 넘는 기업에 대해 영업허가세를 25% 추가 부과한다
<이번 CEO 과세 법안 통과를 이끈 스티브 노빅(Steve Novick)>
이번 법안을 발의한 사람은 스티브 노빅(Steve Novick)으로 포틀랜드의 현 시의원이자, 환경소송 변호사로 활동한 적이 있는 인물이다. 사실 CEO에게 기존보다 과세부담을 더 높이는 이번 법안은 갑자기 뚝딱!! 하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이미 2015년에 이와 비슷한 과세법안이 캘리포니아주에서 발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통과에 필요한 의회의 표를 확보하지 못해, 논의된 법안이 실제 집행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스티브 노빅은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론>을 읽는 동안, 소득불평등을 다룰 수 있는 법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법안이 통과된 마당에 예기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으니 바로 도널드 트럼프. 트럼프 정부의 기본방침이 '감세'이기 때문에 과연 법안이 원래 의도한 대로 실행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트럼프 드림팀(?)은 역시나..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름 아니라 금융위기의 재발을 막고자 2010년 도입된 도드-프랭크 법(Dodd Frank Rule)을 폐기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의 폐부를 들춰낸 영화, 빅 쇼트(Big Short)>
크리스찬 베일 주연의 <빅 쇼트>는 2007년 미국에서 발생하여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다. 주인공인 수학천재 마이클 버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붕괴를 예견하고 회사자본을 대거 공매도(숏 옵션)에 투자한다. 느슨한 대출규제, 탐욕스러운 금융인들, 텅 빈 주택가를 목격한 그는 금융위기를 확신하고, 예언은 현실이 된다. 그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금융위기 당시 일어난 단순 사건사고들이 아니다. 영화가 제기하는 것은 이러한 파장을 몰고 온 금융가와 은행가들의 도덕적 해이와 대리인 문제다.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것처럼, 금융위기 후 주범자 가운데 단 한 명만이 기소되었으며, 그마저도 형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책임에서 해방되고, 두둑히 퇴직금을 챙기는 비윤리적인 태도까지 보인다. 반면 이 아수라장을 수습하는 것은 온전히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대출한 일반시민들의 몫이다.
뜬금없이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토드-프랭크 법안이 도입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1930년대 대공황을 겪은 뒤 금산분리를 골자로 하는 글래스-스티걸 법안(Glass-Steagall Act)이 도입된 것처럼, 금융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오바마 정부는 법적 규제를 신설하기에 이른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볼커 룰(Volcker Rule): 은행이 자기자본으로 위험한 파생금융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가이드라인 제시
2. 금융소비자보호국(Consumer Financial Protection Bureau) : 말 그대로 금융소비자를 보호하는 기관 설립
3. 금융안정감시위원회(Financial Stability Oversight Council) : 은행과 비은행기관(예. 보험사)을 비롯한 중요 금융기관에 대한 포괄적 규제
<정치계의 또 다른 이단아..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트럼프는 일부 측면에서는 공화당의 전통적인 정강에 어긋나는 공약(예. 보호무역)을 내세우며 잡음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금융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공화당과 트럼프의 입장은 같다. 실제로 토드-프랭크 법안이 의회에서 표결에 부쳐졌을 때에도 공화당 의원은 거의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 트럼프의 강경하고 공격적인 행보를 볼 때, 토드-프랭크 법안을 폐기하는 것을 비롯하여 세금을 줄이겠다는 공약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다시 포틀랜드의 과세법안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쯤에서 드는 질문은 과연 과세가 최선인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증세는 근로자 또는 사업가의 근로의욕을 낮춘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더군다나 과세법안이 정말 의도한 대로 소득 재분배를 달성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CEO나 임원들이 세무기관에 포착되지 않는 다른 루트(주식이나 옵션)로 CEO에게 급여를 준다면? CEO의 최고임금을 낮추더라도 남는 수익이 사원들에게 분배되지 않는다면?? 섣부른 법적 규제가 시장의 자유를 저해하고, 심한 경우 정부실패를 초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비티 페이먼츠(Gravity Payments)의 CEO, 댄 프라이스(Dan Price)>
여기에 좀 이례적인 케이스가 있다. 역시 여행한 적이 있는 시애틀에서 들려온 소식이라 반갑다. 작년 그래비티 페이먼츠라는 회사의 CEO가 직원들의 연봉을 7만 달러(우리 돈 약 8천만 원)로 인상했다. 사실 내가 더 놀랐던 건, 기존에 110만 달러였던 본인의 연봉 역시 직원들과 같은 7만 달러로 낮췄다는 점이다. (직원들의 연봉을 높이는 건 그렇다 쳐도 스스로 본인 연봉을 깎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괴짜 같은 방침으로 미국에서 일약 스타 CEO가 된 댄 프라이스는,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앵거스 디턴(Angus Deaton) 공저의 <행복 연구>에서 연봉 인상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두 경제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직원의 행복은 7만 5천 달러를 기점으로 직업에 대한 만족감(행복감)이 최고점을 찍고, 그 이상의 임금 인상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임금인상 이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이직률이 현저하게 낮아졌다는 점이다. 또한 회사 근처에 집을 마련할 여유자금이 생기면서 직원들의 통근시간이 단축되는 효과가 발생했다고 한다. 시애틀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거주비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할 때 임금 인상은 직원들에게 커다란 선물이었을 것이다. 덩달아 사내에 유례없는 베이비붐이 일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남다른 가치관을 지닌 CEO 개인의 의사결정에서 이뤄진 임금인상일 뿐, 사회적 차원에서 CEO에게 소득불균등을 해소하라고 강제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폐쇄적인 임금결정구조를 주주총회에 위임하여 주주 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CEO의 임금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인 노력이 병행되고 있다.
시애틀의 또 다른 얘기를 해볼까 한다. 포틀랜드의 과세법안이 최고임금의 상한선을 규정한다면, 시애틀에서는 15년도부터 최저임금의 하한선을 15달러로 인상하였다. 2015년 기준 연방 최저임금이 7.25 달러임을 감안하면, 단연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시의회의 만장일치로 최저임금이 인상된 뒤 갓 1년 여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책의 효과를 분석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시애틀 시의 전반적인 반응은 긍정적인 듯하다. 법안이 통과될 당시에는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비관적인 전망도 적지 않았지만, 우려했던 실업률 증가와 물가 상승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부정적인 여론도 존재한다. 최근 시애틀 경기(景氣)는 일부 산업(특히 건설업과 첨단산업)이 호황을 누린 덕을 톡톡히 봤기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해고 증가가 가려졌다는 분석도 있다. 실업률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다양한데,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요인을 독립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에는 오히려 실업 증가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분석까지 있다. 특히 사업장의 자동화가 더욱 확대될 가까운 미래 시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기업들이 높은 수준의 인건비를 감당할 의사가 얼마나 있을지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음...사진이 좀 무섭네ㅎㅎ>
시장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기, 도둑질,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속임수를 제재하는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할 경찰, 법원 교도소를 설립하고 지원함으로써
신뢰를 보장하는 것은 정치체제가 할 일이다.
최근 한창 재미있게 읽고 있는 「사피엔스」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완벽하게 자유로운 시장이라는 것은 존재하기 어렵고, 시장이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도록 틀을 짤 필요가 있지만, 이에 대한 접근법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소득불평등 문제가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이른바 '살찐 고양이 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역설한 의원이 있었다.
작년 보고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니계수는 0.307로 OECD 33개국 가운데 18위를 차지했다. 이렇게만 보면 우리나라는 소득불평등이 평균 수준이지만, 불평등정도에 대한 주관적 체감수준을 측정하는 앳킨슨 계수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나라의 앳킨슨 계수는 0.32로 이스라엘, 미국, 터키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수준인데, 이는 우리 국민이 인지하는 불평등 정도가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높은 수준이라는 뜻이다.
지니계수 면에서도 준수하다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세전 지니계수와 세후 지니계수의 차이가 매우 작다는 점이다. 과세를 통해 재분배된 소득을 측정하여 조정한 지니계수, 즉 세후 지니계수와 세전 지니계수 간에 차이가 미미하다는 것은, 달리 말해 조세 재분배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소득불평등 문제는 우리에게 시급한 현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살찐 냥이~>
모두가 완전한 평등을 누리는 세상은 머릿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러나 불평등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 심각한 불편을 초래한다면, 그때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각각의 제도에는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는 법. 당신은 소득불평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소득불평등이 심각하다면 바람직한 제도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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