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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8 / 만찬(The Last Dinner)여행/2017 북인도 2017. 3. 26. 01:25
J와의 식사는 오늘 저녁이 마지막이었다. J는 이를 미리 계산하고 아예 일찌감치 호텔의 근사한 레스토랑을 검색해 놓았다. 바라나시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예외없이 인도 음식점이다. J는 인도에 온 이상 최대한 인도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주의였다.
닭고기 메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인도음식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는 음식이 너무 기름져서 변비에 시달렸는데, 인도에서는 반대로 배탈에 시달렸다. 잘은 몰라도 어디서 비위생적인 음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라씨'가 가장 의심스러웠다. 여튼...)
게다가 인도의 강한 향신료가 아무리 견딜 만하다고는 해도, 어찌 됐든 입에 길들여진 맛은 아니다. 마살라도 고수도 가리지 않지만, 이게 오랜 기간 계속 체내로 들어오니 위장도 놀라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음식에 대한 반응이 예민한 이유로, 그동안 여행지에서 그 지역의 음식을 먹으려는 노력을 가장 덜 기울였는지도 모르겠다.
딸리 한 접시.
뭔가 구성이 더 다양했던 것 같은데 사진이 남아 있는 것 이 둘뿐.
식사가 끝난 후에는 구글맵으로 근처 디저트샵을 찾아봤다. 인도식 화과자를 파는 가게 중에 평점이 좋은 가게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딱히 디저트를 먹고 싶은 생각은 없어, 시험 삼아 먹어볼만 하게 생긴 하나만 골랐다.
판매원은 할아버지 대부터 화과자 사업을 해오고 있다며, 할아버지가 직접 개발한 화과자를 보여주었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여 만들었다는 디저트는 인도의 삼색기를 본 딴 색상의 화과자였다.
아그라에서 들렀던 것과 비슷한 진열대의 화과자점(화과자 가게들은 얼추 다 비슷하다)
시식을 해볼 수 있었다
인도의 국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화과자
색이 그럴듯하다
다시 디저트 가게를 나와 역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늘 걸인과 무엇을 하려는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 정처 없이 헤매는 동물들이 넘쳐난다. 우리가 식사한 근사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뒤, 출입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걸인들이 구걸을 했다. 극명한 빈부 격차를 느꼈다. 레스토랑에서 지불한 비용은 한국 돈으로 4인분이 채 3만 원이 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그리 향유하기 어렵지 않은 먹을 것과 마실 것들인데, 누군가는 당장 먹을 게 없어서 아무나 붙잡고 애걸복걸하는 게 안타까웠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어떤 때는 지겹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고, 참담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빈부 격차도 사회문제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유독 그 격차가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흠칫흠칫 놀랄 때가 많았다)
나와 X, Y는 러크나우로, J는 가야로 향하게 되면서 행선지가 갈렸다. 러크나우나 가야나 일반적인 관광객들은 잘 찾지 않는 곳이다. J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관광하기 위해 가야로 향하는 것이었고, 나는 러크나우에 있는 이맘바라를 보기 위해 향하는 것이었다. X, Y는 향후 아그라로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러크나우까지는 나와 함께 경유하기로 했다.
밤 11시쯤이 되어 우리 셋은 J와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그동안 여행에 도움을 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J는 12월에서 1월 사이에는 늘 말레이시아에 머무르니 말레이시아에 놀러올 일이 있으면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했다. 빈말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빈말이어도 상관은 없었다.
Epilogue in Varanasi.
J는 나와는 성향이 여러 면에서 반대였다. 예를 들어 J는 원칙주의자다. 호주에서 그가 회계사로 일하다 일을 그만 둔 것도 회계법인에서 목격한 부패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그는 릭샤 운전수와 집요하다 싶을만큼 흥정했다. 그가 이기려고 하는 것은 비단 운전수 한 명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그가 인도라는 나라와 씨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J는 인도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유인 즉슨 이토록 가난에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기는 커녕 밑도 끝도 없이 바가지를 씌우고 약속을 어기고 사기를 쳐서 임시방편으로 돈을 마련하는데 이는 문제라는 것이었다. J에게 릭샤와의 흥정은 돈 문제가 아니라 신용의 문제였다.
나는 J와 반대였다. 전체적으로 그가 말하는 원칙에는 동의했다. 그렇지만 나는 흥정을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았는데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힘들었다. 하루에 한 두번은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집요하게 흥정을 물고 늘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두번이다. 매번 정해진 가격 없이 흥정을 하는 일은 보통의 에너지로는 불가능했다. 나는 멘탈을 관리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물러서기로 했다. 둘째, 좀 더 근본적인 문제인데 연민에 더 기울었다. 내가 돈을 더 얹어주는 것이 당장 이들의 삶에 조금은 보탬이 될지언정 장기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을 거란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루종일 인도의 거리에서 걸인들 사이를 지나치다 보면, 내가 살아왔던 기존의 세계가 오히려 비정상적이었다는 생각에 이르러서 혼란스러웠다. 고단이 짙게 밴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내가 억만장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어떤 때는 릭샤 운전수에게 유리하게 흥정을 끝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J와는 신기하게도 말이 잘 통했다. 영어로 대화하다보니 우리말로 했다면 오글거릴 법한 막된 질문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또 그런 질문들에 흔쾌히 대답을 해주었다. 성향이 다름에도 관심사는 비슷했고, 서로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J는 아시아 국가 중에 워낙 한국 여행을 감명깊게 했다고 하니, 공통의 이야기 소재가 떨어질 새가 없었다. 오히려 J가 내게 한국에 대해 알려줬다. 그가 아니었다면 팥국수, 통영의 지리망산이라는 말을 평생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여행에서 얻은 만남 또한 헤어짐이 있는 법. 그리 아쉽거나 섭섭하지는 않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J와 함께한 4일간의 동행만으로 고마운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인도의 무질서가 그런 감정에 오래 매달릴 여유를 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와 X, Y는 J보다 먼저 러크나우 행 열차에 몸과 짐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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