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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루스 베네딕트/을유문화사>
읽은 지 2주 가까이 되어 리뷰를 잘 적어내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워낙 흥미롭게 읽은 책이라 기억을 더듬으며 몇 자 리뷰를 남겨본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을 중심으로 전후정리가 한창이던 20세기 중반에, 일본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서양의 어느 문화인류학자에 의해 이토록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글이 쓰여졌다는 것이 먼저 놀라울 뿐이다. 물론 전승국으로서 미국의 국가적 위상이 한껏 고취되었던 시기에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일부 서구우월주의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엿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논리적 분석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많았다.
共
저자의 분석 가운데에서 가장 울림이 있었던 것은 ‘일본인은 지극히 현세적’이라는 주장이다. 일본인은 개개인이 늘 극도의 긴장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의 사적 영역에서 자신들이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쾌락에 매우 관대하다. 이때의 쾌락의 대상은 식욕이 될 수도, 수면욕, 성욕이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일례로 일본인은 매우 검소하고 절약정신이 투철하면서도, 수년째 세계 1위의 명품시장을 영위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인들은 이처럼 과시욕이나 허영심에 관대하기도 하다. 어떻게 이렇게 극단적으로 모순적인 모습이 일본인들에게 한꺼번에 보이는 것일까?
여기서 한 번 더 공감을 표하는 저자의 주장은 다시 되풀이 하건대 ‘일본인들의 삶의 방식은 매우 양면성을 띤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두고 흔히 ‘도통 속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일본인들이 뿌리깊게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문화 때문이다. 그럼 좀처럼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 보이는 양극단의 모습이 일본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루스 베네딕트는 이런 모순상황을 꽤 명쾌하게 해소한다.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토(神道)'―불교와 토속신앙이 결합한 일본 고유의 종교―에서는 사후세계를 다루지 않는다. 동아시아에 자리잡은 일본 또한 불교의 영향에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일본인들은 불교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요소만을 취사선택했다. 때문에 '윤회'나 '업'처럼 사후세계에 대해 설명을 시도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일본에서 쇠퇴하고, 불교에서 강조하는 '수행'의 방식은 어디까지나 현세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살생을 엄격히 금지하는 불교가 사무라이의 검술에 적극적으로 차용된 것은, 불교가 일본에서 독특하게 전파된 극단적인 사례다.
물론 일본인들이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죽음 이후에 얻을 보상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다. 유일신에 귀의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신사에 가서 참배를 올리는 대상들도 지극히 현세적인 성질을 띤 수천수만의 상징물에 지나지 않는다. 대신에 일본인들은 그들이 매진하고자 하는 것, 그럼으로써 삶의 정수(精髓)를 일궈내는 것을 어디까지나 현세 안에서 이루어내려고 한다. 유달리 일본인들이 신중해 보이고 매사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일본에서 발달한 '선(禪)'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현세적이라는 것만으로 그들의 전체적인 성격을 묘사하는 데에는 부족한 구석이 있다. 일본인들의 사고패턴과 행동양식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상(思想) 뿐만 아니라 사회가 실제로 움직이는 매커니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스 베네딕트는 서구가 르네상스 이래로 지상 최대의 과제로 여겨온 '자유(自由)'의 대척점에 일본인의 '자중(自重)' 또는 '자제(自制)'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유럽과 북미를 비롯한 서양인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내가 바라는 무엇인가를 실현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무엇인가를 충족시켜야 하는 존재'다. 거칠게 말해, 서양에서 '의무'는 '자유'를 올바로 구현하기 위해 뒤따르는 법적, 사회적 개념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마치 '자유'가 소거된 것처럼 보인다. 일본 사회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느 정도 '의무'가 결정되어 있고, 행동반경에 제약이 있다.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로서, 쇼군은 쇼군으로서, 천황은 천황으로서 제 몫을 완벽히 수행해야 한다. 언뜻 보기에 매우 억압적인 시스템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시스템이 '비합리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계층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한, 구성원 개개인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소중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본이 '대동아공영'을 내세우며 동아시아 여러 국가를 침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했다고 루스 베네딕트는 말한다. 역할론을 강조하는 유교국가였던 한국과 중국에서도 일본이 강요하는 역할론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국과 중국에게 강요된 역할이라는 것이 천황의 신민으로서 역할을 다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이러한 요구에 순순히 응할 리 만무했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자중'과 '의무'는 자국 안에서만 통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루스 베네딕트의 최종적인 주장은 서구가 말하는 '자유'야말로 세계보편적인 가치라고 말하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역시 회의적이다.)
신토가 말하는 '현세적인 세계관', 일본인들이 자아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 짚고 나서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아무리 이 모든 것을 일본인들이 체득한다고 한들, 똑같은 인간인 그들이 극심한 긴장상태에 놓여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일본인들은 사회화가 시작되는 청소년기부터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관찰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소속집단의 규범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소속집단의 인정을 얻지 못할 때, 일본인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러나 삶에는 적절한 긴장만큼 적절한 이완이 필요한 법이다. 긴장만 있는 삶은 유지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그들 자신을 어떻게 이완시키는가.
루스 베네딕트의 예리한 관찰력이 빛나는 대목은, 일본문화에서 '의무(義務)'와 '인정(人情)'을 구분하는 주장에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일본사회는 분명 구성원 개개인에게 각자에게 걸맞는 역할을 충실히, 그리고 가급적 완벽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에서 그들이 누리는 개인적 즐거움, 유희, 취미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회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한, 사회규범의 기반을 흔들지 않는 한, 거의 무제한에 가깝게 허용된다. 루스 베네딕트가 책의 제목으로 삼았던 것처럼 일본인들은 국화 구경을 즐기면서도, 정교한 검술에 매료되는 특이한 사람들이다.
역설적인 사실은 지금까지 서술한 일본사회의 특성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결정조차 사회구성원들에게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지곤 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본인이 더 이상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여지가 없다고 할 때, 일본인들은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은 극단적 행위를 취한 개인의 심리보다는 사회적 맥락에서 그러한 죽음의 의미를 받아들인다. 일본사회가 지극히 현세적이면서도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다.
루스 베네딕트
反
이 모든 것이 '일본'만의 현상이라고 생각하는가? 루스 베네딕트는 은연중에 서구와 동양을 대조하면서 '자유'의 반대에서 '자중'을 말한다. 그러나 '자중'이라 함은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에서 모두 미덕으로 여기는 가치다. 물론 동아시아에서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일본이 예외적으로 '선종(禪宗)'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은 맞는 말이다.
물론 루스 베네딕트는 중국 유교의 핵심가치였던 '인(仁)'이 일본에서는 부정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경위를 밝힐만큼 동아시아에 대한 문화연구를 매우 철저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 서구에 대항할 힘을 지닌 국가가 극동아시아에서 급작스럽게 출현했다는 점에 천착한 나머지, 동양철학 전반에서 논의될 수 있는 내용을 일본사회에 국한시킴으로써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를 성급히 일반화하여 분석하는 것은 아닌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보았다.
또한 루스 베네딕트가 자신했던 서구의 '자유지상주의'가 반 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 어떻게 해석될지 모르겠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철학에서는 해체주의와 구성주의가 발전했고, 2000년대 들어서 경제학에서는 신자유주의가 만능이 아니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누구의 자유였을까. 자국의 '자유'가 중요할 뿐 피식민국의 자유는 중요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이제는 피식민국의 후손이 건너가 비인륜적인 테러를 일삼고 있다.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구도가 윤곽을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한 당시에, 루스 베네딕트가 자신감을 갖고 '자유'를 역설한 것도 이해한다. 다만 일본의 '자중'도 서구의 '자유'도 완벽한 답안지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이상, 다시 한 번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중용'의 가르침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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