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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3 / 베른(Bern), 분수의 도시여행/2019 스위스 종단여행 2019. 9. 30. 20:05
3일차 아침 창밖 풍경을 보았을 때, 심란함이란.. 스위스의 일기예보가 정확한 편이어서 이날 하루종일 비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창밖으로 보이던 베터호른과 슈렉호른의 풍경이 물안개에 의해 말끔히 지워진 것을 보니 3일차의 일정까지 통째로 물안개에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대충 전날 동생과 3일차 일정에 대해서는 얘기를 해놓은 상태였다. 날씨 여건이 이렇다보니 자연경관을 둘러보기는 쉽지 않고 도시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될 경우 3일권으로 끊은 융프라우 VIP 패스의 효용가치가 떨어진다는 점 정도였다. 관광할 만한 도시로 나가려면 융프라우 권역을 완전히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든든히 아침을 먹고 인터라켄에서 바젤 방면 열차에 올라탔다. 슈피츠(Spiez) 역에서 툰(Thun) 역에 이르는 길은 툰 호수가 닿을락 말락 하는 거리에 선로가 놓여 있는데, 날씨 탓에 빛깔이 탁해져 있었다. 여행 첫날 인터라켄으로 진입할 때 봤던 툰 호수는 영롱한 토파즈 빛깔을 띠고 있었는데, 이제는 양잿물(;;) 같은 탁한 색깔로 바뀌어 있었다.
제네바(Genève)나 취리히(Zürich) 같은 국제적인 도시에 가려져, 스위스의 수도가 베른(Bern)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베른은 구시가지를 비롯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오래된 도시이다. 헬베티아(Helvetia) 연방의 초석을 닦는 데 구심점 역할을 했던 베른은 스위스 여행중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었고, 또한 독일어권역과 프랑스어권역의 경계 지점에 있는 도시여서 어떤 분위기를 간직한 도시인지도 궁금했다.
인터라켄에서 베른까지 가는 데에는 한 시간여 정도밖에는 걸리지 않는다. 베른역 승강장에 진입할 때 차창 밖을 보니, 건물 벽면마다 유달리 그래피티가 많아서 도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났는데, 어쩐지 고색창연할 것 같았던 베른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내심 놀라기도 했다. 베른역 앞 커다란 유리구조물을 지나 쭉 직진해서 걸어가다 보면 이윽고 감옥탑 아래에 이른다. 베른의 구시가지는 갑갑할 정도로 오래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이 건물들의 회랑은 완전히 아케이드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비가 오는 날씨에도 관광을 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베른은 가까운 바젤보다도 작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도시는 도시인지라 근사한 상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실내를 아주 화려하게 꾸며놓은 미용실(Coiffeur)들도 자주 보였다.
어쨌든간 감옥탑 앞에 이르면 오른편으로는 연방기관―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 색깔의 지붕이 인상적이다―이 보이고 왼편으로는 곰광장(Barenplatz)이 나타난다. 곰광장은 매주 화요일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마침 베른에 간 날이 화요일이었기 때문에 벼룩시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비가 오는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았고 가게도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맥가이버 칼을 다루는 상점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 발길을 돌렸다.
우산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비가 오지는 않았기 때문에―이곳 사람들은 더더군다나 우산을쓰지 않는다―아케이드 바깥과 안을 드나들며 시내를 구경했는데, 아케이드에 있을 때는 딱히 상점을 드나들지는 않다가 거리에 분수대가 등장할 때마다 사진을 남기기 위해 아케이드를 벗어나곤 했다. 선로 위를 달리는 트램과 몇몇 버스를 제외하면 차량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도로를 인도처럼 활보하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다만 시계탑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차량이 늘기 시작한다.
웬 사람이 무리지어 모여 있나 했더니 열두 시 정각이 되기를 기다리며 시계탑 앞에 서있는 인파였다. 열두 시 정각이 되니 커다란 시계 주위를 호위(護衛)하던 인형들이 장난감 병정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길로 계속해서 직진을 하며 독특한 형상을 한 분수대를 계속 마주했다. 아이스하키 헬멧을 쓰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체링거의 분수대부터 위풍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수의 분수대, 그리고 사자의 입을 열어젖혀 찢어보이는 삼손의 분수까지.. 과연 분수의 도시 베른이다.
삼손의 분수가 보이는 지점에 아인슈타인 하우스가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이곳에서 1903년에서 1905년에 이르는 약 2년간 머무르면서 상대성 이론을 만들었다. 상점과 뒤섞인 오래된 건물의 3층이 아인슈타인의 집인데, 이 협소한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나 아시아인들이 많이 보였는데 자녀를 데리고 온 중국인들은 자녀의 학업성취를 바라는 마음에서 집안의 이것저것을 소품 삼아 열성적으로 사진을 남겼다;;
원래는 아레 강변까지 걸어갈 생각이었지만, 아인슈타인 하우스 일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춘희>라는 이름의 한식당이었는데 빈 테이블 하나를 발견해 가까스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스위스 여행중 한국인 여행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곳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현지인들 천지였다. 한국음식이 그리웠던 우리는 음료―한국 캔맥주까지 구비해놓고 있었다―를 제외하고 모든 식사 메뉴를 하나씩 주문했으니, 만족스런 오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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