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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7 / 루체른(Luzern), 중세와 혁명의 잔해를 누비다여행/2019 스위스 종단여행 2019. 11. 1. 23:00
루체른에서의 일정은 다소 걱정이 되었다. 루체른에 머무르는 날은 다해서 이틀이었는데, 2일째 되는 날은 출국을 위해 취리히로 이동을 해야 했으므로 실제 머무르는 기간은 기껏해야 하루 하고 반나절 정도였다. (출국편 비행기는 밤 늦은 시각에 있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동선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보통 많은 관광객들이 루체른→인터라켄(융프라우) 루트를 택하는 데 반해 우리는 인터라켄(융프라우)→루체른 루트로 동선을 정했더니 사실 루체른에 큰 볼거리가 남아 있지 않아서 동생도 기승전결의 순서가 바뀌었다는 푸념 아닌 푸념을 했다. (게다가 그 사이에 체르마트까지 들렀으니 말이다.) 이미 충분히 만족스럽게 여행했으므로 배부른 푸념이었지만, 여하간 여행 성수기를 피해 일정을 잡는다고 잡았는데도, 남아 있는 숙소가 많지 않아 동선이 꼬인 케이스였다.
루체른에 오면 리기 산을 가는 것이 공식처럼 통용되곤 한다. 그런데 융프라우와 마테호른을 이미 보고 온 우리는, 가보기도 전에 굳이 리기 산을 오르는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_~ 나는 정 그렇다면 1시간 거리에 있는 바젤으로 이동에 온천욕이라도 하면서―바젤 근교에는 유명한 온천마을이 몇 군데 있다―여독을 풀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동생은 루체른에서 딱히 가보고 싶은 곳은 없는데, 그렇다고 루체른을 벗어나기에는 시간이나 비용이 드는 게 싫은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바젤을 경유해 아예 프랑스나 독일의 소도시라도 당일치기를 하는 건 어떠냐고 하니, 부모님은 좋아하셨고 동생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여러 가지 옵션 중에 가장 이동거리가 길지만 부모님은 스위스 말고 다른 국가를 더 가본다는 사실에 좋아하셨던 것 같고, 동생은 바로 그 이동거리가 길다는 이유에서 굳이 스위스를 벗어날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었다.
결국 아무런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튿날을 맞았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했기에(?) 아침을 든든히 먹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밤에 이동할 때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싱그럽게 펼쳐진 루체른 호수를 왼편에 두고 지나치는 동안 자동차 박물관, 카지노 건물 따위의 풍광에 걸맞지 않는 건물이 불쑥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 아침 우리가 향한 곳은 빈사의 사자상으로 구시가지가 자리잡은 뢰벤(사자) 광장(Löwenplatz)에서 북동 방면으로 약간 빗겨난 곳에 위치한 명소였다.
유명한 관광명소들을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제 두 눈으로 본다고 해서 절로 감탄사가 나오거나 감정이 격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빈사의 사자상은 오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웅장하거나 화려한 것도 아닌데, 말 그대로 빈사 상태로 쓰러져 가는 사자의 형상을 보고 있으니 헤아리기 어려운 처연함마저 느껴졌다. 18세기말 프랑스 대혁명 당시 끝까지 튈르리 궁전을 사수하던 장병들을 기려 새겼다는 이 석상은, 한때 막강한 힘을 과시했던 절대권력이 기습적인 일격을 받아 맥없이 스러져가는 모습을 무게감 있게 보여준다. 강인한 팔과 다리를 늘어뜨린 채, 신음을 내뱉듯 입을 벌리고 있는 거구의 사자는 자신의 창과 방패를 묘비 삼아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쓸쓸히 죽음을 기다린다.
잠깐 사자상 인근의 기념품 가게를 둘러본 뒤 우리는 카펠교가 있는 루체른 역 방면으로 향했다. 무슨 요일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아도 카펠교 일대에 벼룩시장이 들어서서 이면도로가 현지인들과 관광객들로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날 야경으로 첫 인사를 나누었던 카펠교는 낮에 와서 보니 좀 더 다정다감하게 다가왔는데, 햇빛이 점점 뜨거워지는 정오를 향해 가는 시간대였으므로 석조 또는 목조로 된 처마마다 음영이 짙게 패였다.
카펠교에 올라서서 위를 바라보면 이등변삼각형으로 된 목판에 성화(聖畵)가 채색되어 있고, 난간은 샬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상용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방화에 의한 것인지 몇몇 성화는 전소(全燒)되어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뢰벤 광장에서부터 북에서 남쪽을 내려왔으므로, 카펠교를 건너는 동안 오른편을 바라보면 호수로 흘러드는 로이스 강이 병목(竝木)을 이루는 지점이 마주보였다. 맞은 편으로는 극장과 예수이트 교회의 오래된 건물이 보이고 건너온 방면으로는 시 관공서가 독특한 풍채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들 건물마다 루체른을 상징하는 칸톤의 문양이 걸려 있었음은 물론이다. 카펠교의 바로 옆에는 현대적이지만 어쩐지 가냘퍼보이는 다리가 하나 더 있다. 우리는 이 다리를 가로질러 건너며 다시 한 번 로이스 강의 풍경을 곱씹고, 두 번째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길로 곧장 루체른 역으로 향했다.
동생과 행선지를 정하거나 식사 메뉴를 정할 때마다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는데, 한 번은 그린델발트에서였고 다른 한 번은 루체른에서였다. 그린델발트에서는 내가 화가 난 상태였고, 루체른에서는 동생이 화가 난 상태였는데, 되돌아 생각해보면 원인 제공을 내가 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_= 루체른에서 동생이 못마땅해서 뿔이 났던 건 굳이 시간을 빠듯하게 쪼개가면서까지 스위스를 벗어나 당일치기 여행을 해야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렇다, 오전 루체른 구시가지를 간단히 둘러보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프랑스의 도시 스트라스부르(Strassbourg)였던 것이다'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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