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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앙스와 정치주제 있는 글/<Portada> 2020. 9. 3. 21:10
Roland Barthes casse les clichés
롤랑 바르트 진부함을 벗어던지다
« Le courage de la nuance » (6/6). Contre la pensée dogmatique, certaines figures du XXe siècle ont incarné l’audace de l’incertitude. Pour lutter contre la tyrannie des stéréotypes, l’auteur des « Mythologies » s’en remettait à la littérature et au langage amoureux. (Le 28 août, 2020/Le Monde)
<작은 변화를 위한 용기>(6/6편) 교조주의적인 사조에 맞서, 20세기의 어떤 인물들은 불확실성에 대해 대담한 시도를 구현한다. 고정관념의 폭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 “신화론(神話學; Mythodologies)”의 저자는 문학과 사랑의 언어로 회귀한다.
뉘앙스(nuance)라는 말은 우리말에서도 흔히 쓰인다. 하지만 이번 연재를 쭉 읽으면서 이 뉘앙스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애매모호했다. 보통 우리가 뉘앙스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미묘한 차이’를 뜻한다. 그런데 이 ‘미묘한’이라는 단서에는 여러 의미가 따라붙는다. 말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어떤 낱말을 고르느냐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말투, 때로는 높낮이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발화(發話) 시점에 시선이 어디를 향하느냐 또는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 전달되는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여하간 이 연재 안에서 바르트가 언급하는 ‘뉘앙스’라 함은 작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단초를 의미한다. 이 차이가 어떤 방향성을 띠는 것은 아니다. 그저 부유하듯 유유히 떠다니다가, 자유로운 담론을 만들고 갈등이 빚어내는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갈등이라는 현상에 대해 올바른 해결책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 갈등은 그저 귀에 거슬리는 잡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현실정치는 갈등을 차츰차츰 풀어나가기보다, 특정 측면의 이슈를 부각시켜 세(勢)몰이를 하는 데 몰두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정치적 지혜가 매우 부족했던 사례가,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는 한국전쟁이 아닐까 싶다. 물론 프랑스에서 국민전선이 세를 넓혀나가는 것이나, 독일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이 특정 지지층을 공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와 다를 거라 생각했던 곳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 팽배한 진영 대결 속에서 각자의 양비론(兩非論)을 듣다보면, 반세기 전의 이념대결이 떠오른다. 젠더나 환경, 세대 갈등처럼 반백 년 전까지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던 어젠다들이 부각되는 오늘날, 이념적 도구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사안은 많고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바르트가 말하는 중도 또는 중용(Neutre)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화해의 기미 없이 충돌만이 이어지는 프랑스 사회에서, 또는 프로파간다가 위세를 떨치는 사회주의 중화민국의 경직성에서, 우리가 고려해볼 만한 것은 유연하고 부드러운 ‘무언가’다. 난제를 우회하기도 하지만 매끄럽게 포섭하기도 한다. 때문에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은 말이다. 그것도 상대의 기분을 괘념치 않는 돌직구의 직설어법이 아니라, (심지어 음악적이고 시적인 기교까지 동원하여) 내러티브가 있고 운율이 살아 있는 온화한 말이다. 본문에도 언급되지만 바르트가 추구했던 방향은 정치 진영의 맹공에 시달린다. 이념적 대립이 지금보다 뚜렷하고 타협의 여지가 없던 20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에서 바르트는 정치인들이 보기에 수상한 불가지론자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중간이라는 것은 이도저도 아닌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대안적인 이상향으로써 흑백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전향적인 방법론을 제시했을 뿐이다.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지만 그것이 오답인지 정답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또는 우리가 미처 문제제기초자 하지 못한 질문이 어디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사안을 ‘규명’하는 것만큼 ‘연결하고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이를 통해 조화로운 발전을 모색하자는 것이 바르트의 논지이지 않을까.
프랑스에서는 에마뉘엘 마크롱의 주도로 라 마르슈(la marche)라는 중도 성향의 정당이 국민전선(극우정당)을 저지했고, 독일에서도 녹색당이라는 대안 정당이 뿌리를 내린지도 40년이 넘었다. 우리나라도 이들 국가처럼 다당제를 택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교섭력 있는 제3정당은 없는 상태이다. 이원집정부제를 택하고 있는 프랑스나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과 달리, 우리나라는 대통령제이기 때문에 제3정당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사회도 흑백논리를 탈피한 소통공간이 점차로 그 틈을 벌려나가지 않을까 싶다. 본문은 르몽드의 8월 28일자 기획연재에서 일부만을 발췌하여 번역하였다. [終]
Au printemps 1974, Roland Barthes sillonne la Chine avec une délégation d’intellectuels français. En ces lendemains de Mai 68, le maoïsme transporte maints esprits parisiens. (1974년 봄, 롤랑 바르트는 프랑스 학자들로 구성된 사절단과 함께 중국을 방문한다. 68년 5월 혁명 이후로, 마오이즘은 파리의 많은 지성인들(maints esprits parisiens)을 자극했다.)
Au sens propre, puisque le régime balade ses thuriféraires de villages en usines pour leur apprendre à reconnaître la supériorité écrasante du « socialisme ». (원래 중국 정부는 사회주의의 압도적 우위를 알리기(apprendre à reconnaître) 위하여 도시에서 공장에 이르는 이곳저곳에 시찰단원들(thuriféraires)을 대동하고 다녔다.(balader))
Justement, Barthes étouffe. Ce grand dynamiteur de clichés, qui a connu un vaste succès populaire en France, vingt ans plus tôt, avec ses célèbres Mythologies (Seuil, 1957), est asphyxié par l’omniprésence de la propagande. (바로 이 점이 바르트를 숨막히게 했다. 20년 전 대표적 “신화학”으로 프랑스에서 대중적으로 폭넓은 성공을 거뒀던 이 진부함의 파괴자(grand dynamiteur de clichés)는 도처에 깔린 선전(propaganda; 宣傳)에 마비되었다.)
« Aucun mouvement du sexe », constate-t-il, comme si la chape de plomb totalitaire réprimait non seulement la moindre insurrection, mais encore la plus modérée des érections. (그는 이를 ‘관능적인 움직임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술회한다.(constater) 전제주의적인 족쇄(la chape de plomb; 중세시대 죄수에게 형벌을 가할 때 쓰였던 구리합판에서 유래한 비유적 표현)는 일말(la moindre)의 반발은 물론이고 보다 온건한 형태의 반항까지도 억압했다.(réprimer))
Pas de nuance, mais partout ce « dragon » contre lequel Barthes aura lutté jusqu’à sa mort, en 1981 : la tyrannie du stéréotype. Pour décrie celui-ci, Barthes utilise l’image de la « brique ». A cette langue massive, qui est celle de l’idéologue, il oppose la « bouffée » de langage, dont le modèle est la parole amoureuse, à la fois déclarative, chancelante et éparpillée. (미묘한 변화는 없이 ‘무시무시한 감시인(dragon)’만이 있었고, 바르트는 198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정관념의 독재에 맞서 싸웠다. 이를 묘사하기 위해 바르트는 벽돌 이미지를 사용한다. (여기서 벽돌brique는 고정관념stéréotype의 은유로 쓰인다) 이데올로기라는 묵직한 말에 관하여, 그는 말의 발설(bouffée; 원래 입에서 무언가를 강하게 내뿜는 것을 의미)로 맞선다.(opposer) 발설(bouffée)의 전범(典範)은 사랑의 언어—선언적이었다가 불확실하기도 하고 흩어지는 것—이다.)
Le destin de la langue, donc de l’humanité, se joue dans la dialectique de la brique oppressive et de la bouffée anarchique. Barthes a pu le vérifier au cours de son périple chinois : autant l’idéologie triomphante lui donne la migraine, autant sa mise en échec le met en émoi. (말 그러니까 인간성의 운명은 억압적인 고정관념(brique)과 무질서한(anarchique) 발설의 변증법 사이에서 줄타기 한다.(se jouer) 바르트는 중국을 탐방하는 동안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득의양양한 이데올로기가 그에게 두통(la migraine)을 가져다 줬던 만큼, 그 위압감(mettre en èchec은 상대를 난처한 위치에 놓는다는 관용 표현임)이 그를 동요시켰던 만큼.(le met en émoi))
« Je veux vivre selon la nuance »
Certes, lui-même s’est parfois laissé aller à des formes de dogmatisme. Les textes qu’il publie au cours des années 1950 sont marqués par une lecture marxiste un brin schématique. Et, lors de la tonitruante controverse qui l’oppose au professeur Raymond Picard, en 1965-1966, à propos de Racine, Barthes ne fait pas toujours preuve d’une parfaite amabilité. (물론 바르트 자신도 교조주의적 태도에 종종 빠진 적이 있다. 1950년대에 출판된 글들은 도식화된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65~1966년에 이르는 동안 라신(17세기 말에 활동한 프랑스의 극작가)에 관하여 레몽 피카흐 교수에 반박했던 시끌벅적한(tonitruante) 논쟁에서는 한치도 배려심을 보이지 않았다.)
Et pourtant. A partir des années 1970, le sémiologue fait de la nuance un souci constant et une méthode active. « Je veux vivre selon la nuance. », proclame-t-il. (그러나 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이 기호학자는 그가 줄곧 들러붙었던 관심(souci)과 방법론에 미묘한 변화를 준다. ‘나는 작은 변화에 따라 삶을 살고 싶다’고 그는 표명했다.)
Tenir bon sur cette aspiration, c’est s’en remettre à la littérature. « Maîtresse des nuances », la littérature est gardienne de la pluralité, elle permet de se soustraire aux manichéismes de ceux qui voient le monde en noir et blanc. (이러한 열망에 천착한다는 것은 곧 문학으로 회귀한다는 것이었다. 변화의 주인(Maîtresse des nuances)으로서 문학은 다원성(pluralité)의 수호자이고, 세상을 흑백으로 바라보는 이원론자(les manichéisme)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Chez Barthes, l’amour de la nuance est indissociable de cette figure maternelle auprès de laquelle il a grandi à Bayonne, son père ayant disparu sur le front de la Grande Guerre. (바르트의 작품에서, 변화에 대한 애정은 그의 외가 친척들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아버지가 세계대전 중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바욘(프랑스의 바스크 지역)에서 이들(외가 친척)과 함께 보냈다.)
Nuance visuelle : le souvenir d’Henriette est associé à la douce lumière du Sud-Ouest, gage d’équilibre. Nuance musicale, également : jusqu’à la fin, Barthes a joué du piano auprès de sa mère adorée. (시각적 변조 : 앙리에트(바르트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프랑스 남서부의 균형 잡힌 따사로운 햇살과 관련이 있다. 청각적 변조 : 삶의 마지막까지 바르트는 그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Miner les jugements tout faits>
Or telle est bien l’obsession de Barthes, ce qui rend son héritage encore si subversif aujourd’hui : rêver un discours qu’on pourrait tenir sans l’imposer, inventer une parole qui viendrait miner les dominations routinières, les jugements tout faits. (바르트의 강박관념은 그의 지적 유산이 여전히 그토록 전복적(顚覆的)이게 만든다. : 강요하지 않으면서 효력을 지닐 수 있는 말(discours)을 꿈꾼다는 것, 일상을 지배하는 것들, 그리고 뻔한 판단들을 침식할 수 있는 말(parole)을 고안하는 것.)
Cette utopie, Barthes l’esquisse en puisant dans les trésors de la philosophie orientale. A la fin de sa vie, il s’en inspire pour forger une catégorie qu’il nomme le « Neutre ». (이러한 이상향을 소묘하기 위해 바르트는 동양철학의 유산으로부터 착상한다. 말년에 그는 ‘중용/중도(Neutre)’이라고 명명한 범주를 벼리는 데 골몰했다.(s’inspirer))
Quand il fait son entrée dans la prestigieuse institution parisienne, en 1977, Barthes se présente comme un « sujet incertain », dont l’ambition est de remettre le langage en mouvement. Il voudrait bâtir une parole à la fois enseignante et « hors pouvoir ». (1977년 파리의 저명한 교육기관에 들어갔을 때, 바르트는 자신을 불확실한 주체(sujet)라고 소개했다. 그의 야심은 말을 움직임 속으로 도로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그는 가르칠 수 있으면서도 ‘권력의 바깥(hors pouvoir)’에 있는 언어를 쌓아올리고자 했다.)
Ayant à cœur de retourner cette marginalité en originalité, il a voulu perturber les cadres de l’institution en faisant de l’enseignement une échappée belle, ouverte à la multiplicité des trajectoires, guidée par un maître sans maîtrise. (소외된 것들을 독창적인 것으로 돌려놓으려 하는(avoir à cœur) 한편, 그는 교육기관의 틀을 훼방하고자 했다. 경로(經路)의 다양성에 열려 있고, 학위가 없는 교수에 의해 지도되는, 널찍한 탈출로(échappée)를 가르침으로써.)
Cette façon de voir éclaire la relation douloureuse que Barthes entretient avec les espaces où s’accusent les ligne de force idéologiques, à commencer par les arènes médiatiques et politiques. (이러한 관점은 이데올로기의 세(勢)가 뚜렷한 영역에 대하여 바르트가 유지해왔던 힘겨운 관계가 언론과 정치권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을 조명한다.(éclairer) (바르트가 현실세계에서 이원론에 근거한 정치와 언론의 집요한 수사(修辭)에 힘들어했다는 의미))
Cette démarche lui est d’autant plus insupportable qu’il considère la scène politique comme le lieu de la bêtise. Quand il dit cela, il pense d’abord à la démagogie d’extrême droite, comme en attestent ses articles consacrés au poujadisme, cette manière de « décréter néant tout ce qui risque de substituer l’explication à la riposte ». (이러한 이원론적 접근법은, 그러한 정치 현장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그로서는 매우 견디기 힘들었다. 그가 이렇게 말을 했을 때는, 무엇보다도 극우에 의한 우민 정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푸자드주의(제4공화국 말기(1950년대) 프랑스에서 득세했던 극우 포퓰리즘)를 향해 썼던 기고문에서 진술했다시피,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반박에 대해 설명으로 변용할(substituer) 만한 그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한다. (양방향적인 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논리에 의해 시민들을 마비시키는 정치에 대한 우려를 의미))
« Quand un ensemble de positions paraissent se réifier (…), j’ai envie d’aller ailleurs, confie-t-il en 1977. Et c’est en cela que je pourrais me reconnaître comme un intellectuel ; la fonction de l’intellectuel étant d’aller toujours ailleurs quand ‘ça prend’ ». (“직책 일체가 정돈되면… 다른 곳에 가고 싶다” 1977년 그는 토로한다. “이를 통해 나는 지식인으로서 나 자신을 재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quand ça prend)’ 지식인의 기능은 늘 저물기(aller ailleurs) 마련이다.)
Ces mots expliquent pourquoi Barthes ne s’est pas joint aux manifestations de Mai 68. Et aussi pourquoi il a refusé, huit ans plus tôt, de signer le « Manifeste des 121 », qui prônait la désobéissance militaire en Algérie. (이 말은 왜 바르트가 68혁명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왜 그가 이보다 8년 전 알제리 군사작전에 반대하는 ‘121인의 선언문’(1960년 지식인을 중심으로 발표된알제리전쟁에 반대할 권리에 대한 선언)을 거부했는지, 그 까닭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Une espérance d’émancipation>
Pour lui, le Neutre n’est pas synonyme de pantalonnade ! C’est une valeur active qui exclut tout ce qui est systématique, et donc aussi de rester systématiquement en retrait. (바르트에게 중도(Neutre)는 기만(欺瞞 ; pantalonnade)의 동의어가 아니다! 중도(중용)는 체제를 배제하면서도 한 걸음 물러서 체제 안에 머무르는 능동적인 가치다.)
Pour inventer d’autres manières de vivre ensemble, il vise à réunir les idéaux du révolutionnaire Karl Marx (changer le monde) et du poète Stéphane Mallarmé (change la langue).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바르트는 (세계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칼 마르크스의 혁명사상과 (언어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를 결합시킨다.)
Mais, précisément, le combat de Barthes consiste d’abord à traquer le pouvoir à même la langue. Pas question, pour lui, de se laisser enrégimenter par un discours qui pourrait lui-même devenir hégémonique et figé. (보다 정확히는 바르트의 투쟁은 권력을 말의 끝까지(à même la lange) 몰아가는 데 있다.(consister à) 그 자신을 패권적이고 경직되는 담론에 옭아매는(enrégimenter) 것은 그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Si l’on ajoute que le premier maître de Barthes fut non pas un théoricien mais un chanteur, le baryton Charles Panzéra, on comprendra que le contraire du systématisme, ici, c’est l’amour rythmé de la nuance. (바르트의 첫 스승이 학자가 아닌 성악가(바리톤) 찰스 판체라라는 점을 덧붙이면, 체제의 반대편 그곳에는 섬세한 운율이 있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있을 것이다.)
« N’est-ce pas finalement une piètre idée du politique de penser qu’il ne peut advenir au langage que sous la forme d’un discours directement politique ? L’intellectuel (ou l’écrivain) n’a pas de lieu—ou ce lieu n’est autre que l’Indirect : c’est à cette utopie que j’ai essayé de donner un discours juste (musicalement). ». (정치인들이 ‘직설적인’ 정치 담론의 모양새가 아니고서는 언어를 끌어들일(advenir)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지식인 (또는 작가)는 그럴 여지가 없다. 간접적일 뿐이다. 이것이 내가 (음악적으로) ‘올바른’ 담론을 통해 시도했던 유토피아다.)
Telle serait la vibrante leçon de Barthes : la hardiesse est une délicatesse, et la bravoure vaut le détour. (이는 바르트의 생생한 충고가 될 것이다. 무모함(la hardiesse)은 날카로운 것이고, 용기(la bravoure)는 부드러운 것이다. (직역하면 무모함은 과민한 것이고, (그래서 허약한 것이고,) 용기는 완곡한 것이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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