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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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을 본 여자들일상/book 2024. 1. 6. 20:51
자주 찾는 카페에서 감사하게도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달의 뒷면을 본 여자들』. 표지에 묘령(妙齡)의 그림이 그려진 이 책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림이 글을 닮아가고 글이 그림을 닮아가는, 글과 그림 사이에서 새로운 창작행위를 모색하는 형태의 작품이다. 정오가 넘도록 늦잠을 잔 어느날,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상태에 만족스러워하며 무얼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책을 들고 집앞 카페를 찾았다. "보도블록의 요철을 디딜 때마다 전해지는 발바닥의 울렁거림 틈 안쪽 어딘가 새겨지는 굴곡" (p.44 중) 작품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특징은 글 안에 마침표가 없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호흡에 변화를 주는 것은 고작해야 쉼표 정도다. 마침표가 없다고 해서 독서가 숨가쁜 것은 아니다. 종결어미로 끝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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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아가일상/book 2024. 1. 2. 00:28
연기다. 한낱 연기다! 모든 것이 연기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한평생 일했건만, 한평생 뼈 빠지게 일했건만 무슨 성과가 있는가? 한 세대가 각 다음 세대가 와도변하는 것은 없다. 예부터 있던 지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돌아간다. 해는 떴다가 지고 다시 떴다가 지기를 되풀이한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불고 돌고 돌며 다시 돈다. 이리 불고 저리 불며 늘 변덕스럽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들지만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옛날부터 흐르던 곳으로 흐르고 처음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 모든 것이 따분하다. 극도로 따분하다. 아무도 그 의미를 찾지 못한다. 눈에도 따분하고 귀에도 따분하다. —전 1:2~9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수확할 때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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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향기—샤넬 No.5와 레드 모스크바일상/book 2024. 1. 1. 19:11
후각을 통해 역사의 격변기를 들어다본다는 건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보고 싶지 않은 것으로 시선을 돌릴 수는 있지만, 알고 싶지 않은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쉬지 않을 수는 없다. 때문에 때로 후각은 시각보다도 많은 것을 전달한다. 역사와 사회에 관한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말하듯이 후각은 "비본질적으로 인식되어 합리성의 세계에서 추방되었(p.45)"고, 사회과학적 텍스트에서 냄새는 깔끔히 표백되었다. 이 책은 그렇게 도외시되었던 후각에 기반하여 크게 두 축의 이야기를 대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세계사를 새로운 렌즈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한 축에는 자유주의의 세계가, 다른 한 축에는 공산주의의 세계가 있다. 한 축에는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라는 조향사가, 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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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갑시다일상/film 2023. 12. 31. 13:06
ただ単にそういう人だったと思うのが、難しいですか? 오랜만에 본 영화 . 작년부터 보고팠던 영환데 연말을 맞아 재개봉하면서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딱히 이 영화에 배경지식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하마구치 류스케(濱口竜介)라는 감독의 이름만 보고 먼저 영화에 관심이 생긴 경우다. 영화의 오프닝에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여자 없는 남자들(女のいない男たち)』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된 하나의 에피소드가 원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라면 여러 편 읽어봤지만, 근래에 흥미를 잃으면서 집에 원서로 사다 놓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街とその不確かな壁)』을 읽기를 미룬지도 한참 되었다. 그의 글을 영화로 보는 것은 처음인데, 오토(音)와 카후쿠(家福)의 무미건조한 톤은 안톤 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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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전쟁(1954-1962)일상/book 2023. 12. 28. 10:23
가톨릭의 이런 적극적 행동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레지스탕스의 냄새를 맡게 된다. 알제리전쟁이 발발한 시점은 대독항쟁으로부터 10년도 안 된 시기였고 저항의 정신은 부식되지 않았었다. 프랑스인 다수가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것은 아닐지라도 대독저항이 프랑스 현대사와 지식인의 사고에 미친 영향은 심대하다. 이는 레지스탕스를 도운 민중이 매우 적었다는 사실로도 희석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제리전쟁에 대한 프랑스 교회의 비판은 알제리 자체가 그 원천이었다. 오랫동안 식민지와의 깊은 연관으로 갖가지 경험의 보고(寶庫)가 된 식민지는 교회의 존재를 새삼 되새기게 했다. 전대미문의 세계전쟁 직후에 가톨릭의 신자나 의례가 퇴조하는 상황이 되자 교회는 오히려 민중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식민지인은 민중 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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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산(Le otto montagne)일상/film 2023. 10. 25. 08:56
무언가에 꽂히면 반드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상, 미루고 미루던 영화 을 마침내 영화관에서 관람했다. 요 몇 주간 잔잔한 영화를 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고 느끼던 차였다. 잔잔한 영화라고 하면 어쩐지 프랑스 영화가 먼저 떠오르는 건 일종의 선입견일 텐데, 언제부터인가 미국 영화는 상업성 짙은 영화이고 미국 이외 지역의 영화는 재미는 덜해도 의미를 곱씹어볼 만한 영화라는 편견을 갖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영화 중에 잔잔한 영화가 없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닌데, 그밖의 나라, 특히 라틴계 유럽 국가들의 영화들의 연출이 더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는 건 결국 개인의 취향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이탈리아 영화의 제목이 , 그러니까 제목만으로 어쩐지 구미를 당겼던 이름이다.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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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冒瀆)일상/book 2023. 10. 23. 09:02
예전에 간쑤성 일대를 여행하면서 눈에 담았던 풍경을 떠올리면서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박완서의 글은 언제 읽어도 좋고, 아낌없이 담긴 티베트의 풍경사진은 활자를 읽는 것만큼이나 공들여 한 페이지를 묵시하게 만든다. 이 책은 원래부터 읽어두려고 일찍이 온라인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인데, 최근 S 누나의 추천을 받아 마침내 결제를 했다. S 누나가 읽고 싶으면 빌려줄 테니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늘 그렇듯 내 책 한 권을 소장하는 게 더 좋다. 노령으로 티베트에 여행을 가 고산증세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여행기를 남긴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느껴지는데, 그 글이 따뜻하고 다감해서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모독(冒瀆)'은 그 사전적 의미가 '말이나 행동으로 더럽혀 욕되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