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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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가을(Deutscher Herbst)일상/film 2023. 4. 10. 21:57
한 여자에게 인생을 저당잡힌 남자와 그 남자의 인생을 구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마리아라는 여자의 이야기. 영화가 끝난 뒤 시네토크가 따로 없었다면 단순한 치정극, 인생역정 스토리 정도로 이해했을 것 같다. 시네토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 영화의 역사적 맥락들이 각 장면마다 따라 붙기 시작한다. 일단 영화의 도입부에 아돌프 히틀러의 초상이 나타나는 것과 영화의 종반부에 헬무트 슈미트의 초상이 수미상관으로 나타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볼 수 있다.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 두 인물의 대비는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독일 영년(零年)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전후 폐허가 된 독일. 독일 역사의 시곗바늘은 원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광인의 출현은 독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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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일상/book 2023. 3. 19. 11:31
모가지가 긴 초병과 나뭇결이 고운 장롱과 이 조화롭던 윗방이 잃어버린 낙원의 한 장면처럼 가슴 뭉클하게 떠올랐다. 천 년을 내려온 것처럼 안정된 구도에 익숙해진 나의 심미안에 조약한 원색으로 처바른 반닫이는 너무나 생급스러웠다. —p.56 말세의 징후가 도처에 비죽거리고 있었다. 나하고 동갑내기를 멀리 시집보낸 소꿉동무 엄마가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내 나이에 시집을 가다니. 그때 나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그러나 시골에선 조혼이 유행이었다. 극도의 식량난으로 딸 가진 집에선 한 식구라도 덜고 싶은데 정신대 문제까지 겹치니 하루빨리 치우는 게 수였고, 아들 가진 집에선 병정 내보내기 전에 손이라도 받아 놓고 싶어 했으니까. —p.179 개성에 미군이 들어온 건 삼팔선을 잘못 그어서 그렇게 된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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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Mon oncle)일상/film 2023. 3. 12. 12:16
La vie, c'est très drôle, si on prend le temps de regarder. 감독인 자크 타티 본인이 주인공인 윌로 아저씨로 등장하는 영화다. 허술하고 무능하고 생산적 활동과는 거리가 먼 윌로지만, 우리 주변에 이런 아저씨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팍팍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셈법에 서툴고 말주변이 없고 어리숙한 윌로. 그런 그는 매제에게는 골칫거리일지 모르지만, 조카 제라르에게는 믿음직한 삼촌이고 이웃 소녀에게는 다정다감한 친구다. 너무 무구(無垢)한 윌로는 요즘 세간의 시선에서 보자면 한심한 사람, 사회에 기여하는 게 없는 사람, 아니면 경계해야 할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웨스 앤더슨의 처럼 아기자기한 프랑스 영화는 많지만, 이 영화는 손에 꼽을 만큼 특히나 영화 속 무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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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요일상/music 2023. 3. 11. 00:12
오늘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촌의 한 샌드위치 가게에 다녀왔다. 신촌 일대에서 자취하던 시절 자주 찾던 가게다. 회사에서 멀지 않다고는 해도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거리에 있음에도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작년 말 졸업과 입사가 맞물리는 시점에 한번 들러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경황이 없어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잠시 비는 시간을 이용해 신촌으로 향했다. 작년 초 프랑스로 떠나기 전인, 그러니까 재작년 연말에 가게를 한 번 찾았으니까 일 년 하고도 반만에 가게를 찾은 것이다. 그래봐야 점심에 먹는 샌드위치일 뿐인데, 실은 가게 아주머니의 안부를 묻고 싶었다. 이따금 오래전 인연들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잠시나마 좋은 인상을 느끼며 좋은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의 근황. 꾸준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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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Aftersun)일상/film 2023. 3. 3. 11:36
Oh life is bigger It's bigger than you And you are not me The lengths that I will go to The distance in your eyes Oh no I've said too much I set it up 오랜만에 픽한 영화는 이다. '애프터썬'이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태양처럼 절대적이었던 아버지라는 존재를 시간이 흘러 회상하는 이야기다. 자연스럽게 포개지는 화면들만큼이나 앞선 시간과 후행하는 시간이 셀로판지처럼 겹겹이 쌓여 이 영화의 색깔을 만들어낸다. 과거의 소피가 바라본 아빠 캘럼은 생각했던 것보다 가녀렸고 미숙했던 존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피 자신에게만큼은 태양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자 부단히 애썼던 존재였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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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프랑스 영화일상/film 2023. 1. 25. 00:32
올 연말연시는 프랑스 영화와 함께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이다. 영화의 배경은 파리 남동부 이브리 쉬르 센느(Ivry-sur-Seine)에 자리한 철거 직전의 시테 유니벡시테(Cité universitaire)라는 공동주택이다. 영화 도입부에도 자료화면을 통해 간략하게 소개되지만 이 영화는 실화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이 공동주택은 최초의 우주사인 유리 가가린에 의해 1963년 준공된, 이 지역(Val-de-Marne)에서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그러던 것이 반 세기를 넘기면서 안전상 문제로 인해 2019년 철거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때문에 영화는 시테 유니벡시테에 대한 오마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는 폭발 직전의 건물 안을 무중력으로 유영한다는 판타지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고, 벙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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咖啡時間일상/coffee 2023. 1. 24. 17:39
올 연말연시는 유난히 정신없이 흘러갔다. 졸업학기에 준비했던 모든 일들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대가라 할지 건강이 조금 나빠졌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채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면서 옥죄는 마음도 들었다. 여유가 없었다. 견디다보면 지나가 있는 것이 시간이라지만, 그 견딤을 견뎌내는 건 매번 새롭고 당혹스럽다. 그런 생경한 기분에서 나의 어른되지 못함을 발견하고 꿀꺽 숨을 삼킨다. 최근 동네에서 자주 찾는 카페 두 곳이 문을 닫았다. 하루 지나 하루 새로운 가게가 열리는 어수선한 골목에서도 7년 넘게 자리를 지켜왔던 카페들이다. 내 일상을 채워가던 작은 조각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에서 한두 조각 이상의 상실감을 느낀다. 한 카페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과 한 주 사이에 황황히 문을 닫았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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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향수(La Nostalgie heureuse)일상/book 2023. 1. 5. 10:37
C’est un phénomène qui m’arrive souvent, surtout avec les miens: je veux confier quelque chose qui me paraît important et le mécanisme se bloque. Ce n’est pas physique, il me reste de la voix. C’est de nature logique. Je suis assaillié par cette interrogation : « Pourquoi le dirais-je ? » —p. 19~20 Bien plus tard, j’ai découverte que celle-ci était méprisée en Occident, qu’il s’agissait d’une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