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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이사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3. 8. 26. 10:38
최근에 이사를 했다. 늘 그렇듯이 짐이랄 게 정해져 있고 많지도 않다. 그 중에 늘 껴 있는 건 찰스 에베츠의 커다란 흑백사진 벽보도 있다. 어쨌든 짐은 단출한데, 또 언제나 그렇듯이 이사 후에 짐이 정리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들을 새로이 사들여야 할 텐데, 넓지도 않은 집에 더 많은 물건을 들이기가 꺼려지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고민하다가 책장으로 쓸만한 선반을 하나 중고거래로 사들였다. 새까만 2단 철제 선반이다. 가운데 선반이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서 좁은 방에서도 시야를 가리지 않는 시원한 디자인이다. 나는 장대비가 오락가락 하는 어느 저녁에 이 녀석을 사들고 30분 거리를 낑낑대며 걸어왔다. 거래한 장소에서 손에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물건을 곧바로 분해한 뒤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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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행 열차여행/2023 늦여름 목포 2023. 8. 24. 18:09
목포는 올해 봄 출장으로 들르면서 한번쯤 여행으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도시다. 그렇게 해서 하루는 한달 전 쯤인가 무턱대고 숙소를 예약해두었다. 숙소 위치는 목포의 구시가지. 여행 당일이 되고 나름 여름휴가 기간이 끝나가는 시점이라 사람이 많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서울역을 출발한 열차는 광주송정 역을 지나면서부터 퍽 한산해졌다. 마침내 목포역에 내렸을 때, 나를 맞이한 건 바닷바람 한 점 없는 찜통 더위였다. 마치 빛에 타들어간 필름처럼 태양이 쏟아지는 인도가 새하얗게 바랬다. 나는 옷가지와 카메라 따위로 빵빵해진 카키색 가방을 메고 15분여를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한동안 에어컨 바람을 쐬다가 단출한 차림으로 숙소를 나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나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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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존재일상/book 2023. 8. 22. 13:08
내가 나의 회한을 가라앉히는 데 사용했던 이 공식은 내 정신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플라톤을 칭송하던 나의 가장 훌륭한 사상으로부터 이상적인 유령을 만들어냈다. 나는 자유분방하고 삐뚤어지고 연약하면서도 내 존재의 영역 안에서 엄격하고 강직한 영혼, 부패할 수 없는 영혼을 발견하고 흡족해했다. 나는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 영원히 사랑받을 존재라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나의 모든 악습과 나의 모든 비참함과 모든 약점이 바로 이 환영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나는 모든 똑똑한 남자들의 꿈이 나를 위해서라도 현실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배신을 모르는 여자를 지속적으로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p.65 나는 그를 상상할 때마다 항상 그의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한 주인공을 떠올렸다. 그는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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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이야기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3. 8. 10. 08:53
하루는 자주 찾는 카페에 갔다가 만석이어서 별 수 없이 바로 옆 공원 정자에 잠시 앉았다. 비가 걷힌 뒤 푹푹 찌는 듯한 날씨였다. 그늘 아래 몸을 숨기고 넋놓고 앉아 있는데, 정자 위 마루에서 페트병으로 장난치는 아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더위에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던지 내가 오기 전부터 있던 아이인지 내가 오고 나서 나타난 아이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옆에는 웬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내게 다가와 연신 살갑게 부대낀다. 아마 나한테서 강아지 냄새가 나서일 수도 있고 천성이 사람을 좋아하는 강아지일 수도 있다. 그 품이 예뻐서 나도 놀아주게 된다. 사내 아이는 물이 반쯤 담긴 페트병을 던지며 노는 데 여념이 없다. 내가 강아지 나이를 물으니 그제서야 8개월이라고 짧게 답한다. 이름은 라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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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여름일상/book 2023. 8. 5. 12:03
내가 지금 내거는 건 다름 아닌 내 삶이다. 뜨거운 돌의 맛이 나는 삶, 바다의 숨결과 지금 울기 시작하는 매미들로 가득한삶. 미풍은 상쾌하고 하늘은 푸르다. 나는 꾸밈없이 이 삶을 사랑하며, 이 삶에 대해 자유로이 이야기하고 싶다. ……이 태양, 이 바다, 청춘으로 끓어오르는 내 심장, 소금 맛이 나는 내 몸, 노란색과 파란색 속에서 부드러움과 영광이 교차하는이 광활한 배경. 이것들을 정복하기 위해, 내 힘과 능력을 다해야 한다. 이곳의 모든 것이 나를 본연의 나 자신으로 내버려둔다. 나는 나의 어떤 부분도 포기하지 않고, 어떤 가면도 쓰지 않는다. 세상의 온갖 처세술 못지않은 생활의 기술을 다만끈기있게 익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p. 23~24 인간이 되는 것은 늘 쉽지 않다. 순수한 인간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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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숲과 안반데기주제 없는 글/印 2023. 7. 31. 20:31
오늘은 필름카메라보다 디지털카메라에 손이 가는 날이다. 아직 사놓은 필름 여분이 있지만, 오늘은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디지털카메라를 집어들었다. 디지털 카메라와 함께 염두에 두었던 여행을 가보마 하고. 여행이라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반일짜리 당일치기였지만, 서울을 오고가는 일은 긴 여행과 똑같은지라 금전적 부담 때문에 갈지말지 잠시 망설여졌다. 작년 반 년간 프랑스에 체류한 이후로 국외 여행보다 국내 여행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올해 들어서 보름에 한 번 꼴로 서울을 벗어나 여행을 하고 있는 터였다. 행선지는 있지만 계획은 없다. 나는 예매 어플을 몇 차례 새로고침한 끝에 진부(오대산)행 열차 티켓을 하나 끊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어두고 싶었지만, 피서철 서울역은 어느 가게를 가도 사람으로 미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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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일상/book 2023. 7. 30. 10:39
관대한 사람의 세상은 점점 넓어지지만 인색한 사람의 세상은 갈수록 좁아진다. 잠11:24 허식과 허세의 삶은 공허하지만 소박하고 담백한 삶은 충만하다. 잠13:7 지혜는 아름다운 집을 세우지만 미련함이 와서 그 집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잠14:1 어리석은 몽상가는 망상의 세계에서 살고 지혜로운 현실주의자는 발을 땅에 붙이고 산다. 잠14:18 무엇이 옳은지 아는 것은 마음속 깊은 물과 같고 지혜로운 사람은 내면에서 그 샘물을 길어 올린다. 잠20:5 지혜가 있어야 집을 짓고 명철이 있어야 집을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운다. 잠24:3 네 원수가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면 가서 점심을 사 주고 그가 목말라하면 음료수를 가져다주어라. 그는 네 관대함에 깜짝 놀랄 테고 하나님께서 너를 돌봐 주실 것이다. 잠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