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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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변천(半邊川)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3. 14. 15:37
서석지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국도 옆으로는 꽝꽝 얼어붙은 실개천을 따라 무채색의 단애(斷崖)가 펼쳐졌다. 절벽의 거친 단면은 마치 산봉우리가 겹겹이 포개어진 백제의 대향로를 연상케 했다. 낭떠러지는 수직낙하를 거부하듯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지류가 반변천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부드럽게 입수(入水)했다. 그 접면에는 사람의 왕래가 있을까 싶을 법한 신식 정자가 서 있다. 예의 얼어붙은 실개천은 어쩌면 바위보다도 단단해 보이고 흙보다도 불투명해 보였다. 겨울철 우리나라의 암석은 가장 본래의 색을 띤다. 초록(草綠)이 사라진 겨울 풍경 속 암벽은 그을음, 얼룩, 마모 따위의 흔적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다. 노령의 암석들에서 환부(患部)의 심상을 떠올렸다가, 인고(忍苦), 내강(內剛)의 추상적 개념을 발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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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지(瑞石池)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3. 12. 03:17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목적지 없던 이번 여행을 합리화할 구실을 마침내 발견했다면, 그건 바로 서석지(瑞石池)가 아니었을까. 서석지를 품은 작은 마을은, 안에서부터 새어나오는 인기척이 부재했다기보다는, 바깥으로부터 일체의 소리가 소거된 것처럼 보였다. 소리가 사라진 세상은 이런 것일까, 소리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사위를 둘러보아도 한겨울 모락모락 피어오를 법한 굴뚝 연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헐벗은 나뭇가지에도 바람에 나부낄 잎사귀 하나 남아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줄어든 소리의 부피만큼, 차분해진 마음이 내 몸보다도 크게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지구에 도착하기도 전 우주복을 벗어버린 비행사가 된 기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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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越松亭)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2. 4. 19:17
영양에서 울진으로 넘어온 이튿날, 후포항에는 비가 내렸다. 여인숙의 흐린 창문이 포개져 창밖 풍경은 마치 희미해진 과거의 영상을 보는 듯했다. 밖으로 나섰을 때는 바닷바람으로 날씨가 쌀쌀한데도 눈이 아닌 비가 오는 것이 의아했다. 험상궂은 날씨와 달리 울진의 바다는 잠잠했고, 쾌청한 날씨에 거칠게 파도가 일던 지난 7번 국도 여행이 생각났다. 울진에서는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얗던 그 많은 산등성이는 보이지 않았다. 후포항의 모든 건물들은 자석에 달라붙은 철가루처럼 오로지 해안선에 의지해 삐뚤빼뚤 열을 이루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 향한 곳은 월송정. 빠른 길을 버리고 부러 국도를 따라 해안가를 운전한다. 언젠가 삼상사(三上思)에 관한 구절을 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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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파리(竹波里)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2. 1. 17:46
왜 영양(英陽)이었냐고 묻는다면 그저 목적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목적지가 없어도 어딘가에는 늘 도착해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그곳이 영양군, 그 안에서도 수비면, 그 안에서도 죽파리였을 뿐이다. 죽파(竹波),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눈앞에서 대숲이 너울댈 것만 같은 이 마을로 나를 이끈 것은 바로 자작나무 숲이었다. 겨울이 되고 오래 전부터 설경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영양으로 오게 되었을 때 설국을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안동과 영양, 울진, 영덕을 차례로 들렀는데 이 중 영양에서만 산등성이의 북사면마다 눈이 녹지 않았다. 영양의 둥그런 산머리마다 밀가루를 체로 걸러낸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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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동산, 바람을 모으는 곳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4. 3. 18:27
영양에 왔으니 영양이 궁금하다. 그렇게 해서 영덕을 가기에 앞서 들른 곳이 맹동산 일대에 자리잡은 영양 풍력발전소다. 숙소가 위치한 입암면으로부터 직선거리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풍력발전단지까지 가는 데 한 시간 남짓 시간이 걸렸다. 이 일대는 사과 농사가 잘 되는지 어딜 가도 사과 나무가 흔하다. 나이가 어린 사과나무들은 한창 손질을 받고 있는 듯 모양이 제각각이고, 다 자란 사과나무들은 여러 개의 와인잔을 찍어낸듯이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겨울 산책」에서 데이비드 소로가 찬탄했던 개성 있는 야생사과와는 거리가 멀다. 저마다 재능이 다른 아이들이 평범한 어른이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고장에 온 이상, 이날 오후 영덕에서 청송으로 가는 길에 국도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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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盈德)은 바다다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3. 29. 01:17
국도를 운전하는 것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영양에는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 하더라도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잡아먹는다. 맹동산 풍력발전단지를 거쳐 영덕으로 가는 데는 도합 두 시간 가량이 걸렸다. 국도 옆으로는 이 지역의 특산품인 사과나무의 맨들맨들한 나뭇가지마다 한낮의 뙤약볕이 흐릿하게 부딪친다. 병에 걸린 손가락처럼 마디가 굵은 나뭇가지에는 열매도 잎사귀도 남아 있지 않다. 국도를 운전할 때는 이런 크고 작은 풍경들을 마주하는 것이 정겹다. 주마간산으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리 일행은 강구항으로 곧장 가는 대신 영덕군의 북쪽에 자리잡은 오보리 쪽으로 빠져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여기에는 어쩐지 번화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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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英陽)에 머물며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3. 5. 03:20
2월초 진관동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것이, 2월말이 되면 무대를 영양으로 옮긴다. 조금씩 위치가 다르기는 하지만 경상북도에는 유난히 ‘영’이라는 말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영양, 영덕, 영주, 영천. 별 건 아니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이 네 곳 모두 다 다른 한자를 쓴다는 점이다. 英陽, 盈德, 榮州, 永川. 직접 차를 몰아 도착했던 영양은 원래 지난해 안동 일대를 여행하면서 한 번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서울과 영양을 오가는 버스가 있어도 자동차가 아니면 접근하기 힘든 곳이다. 인구도 전국 지자체 가운데 울릉군 다음으로 가장 작은 곳) 당시에 영양에 와보고 싶었던 이유는 맹동산 일대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장관이라는 글을 인터넷 어딘가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궁화호를 타고 안동에 다다랐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