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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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일상/book 2018. 4. 4. 23:54
우리는 그림을 바라보고, 그림 속의 화가는 우리를 응시한다. 더도 덜도 아닌 대면(對面), 갑자기 서로 마주친 눈길, 서로 교차되면서 겹치는 곧은 시선, 그렇지만 이 상호적 가시성의 가느다란 선에는 불확실성, 교환, 회피라는 시선을 포괄하는 복잡한 망 전체가 내포되어 있다. 화가의 시선은 우리가 소재(素材)의 자리에 있는 경우에만 우리에게로 향한다. 관람자로서 우리는 추가 요소일 뿐이다. 우리는 화가의 시선에 받아들여지지만 또한 화가의 시선에 의해 축출되고 우리보다 먼저 언제나 거기에 있던 것, 즉 모델로 교체된다. 그러나 역으로 화가의 시선은 그림의 바깥으로, 화가와 마주 대하는 허공을 겨냥하는 것으로서, 관람자들이 오는 그만큼 많은 모델을 받아들이는 셈이며, 그 명확하나 중립적인 장소에서 주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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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II일상/book 2018. 3. 4. 02:55
칩거생활은 세월의 흐름을 정지시키므로 시간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소를 바꾸는 일일 때가 있다. 발베크로의 내 여행은 그저 자신의 치유된 모습을 보고자 나서는 회복기 환자의 첫 외출과도 같았다.오늘날이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여행을 보다 쾌적하다고 여겨지는 자동차로 했을 것이다. 지구 표면이 변하는 다양한 단계를 보다 가까이에서, 보다 내밀하게 쫓을 수 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의 특별한 기쁨은 우리가 피곤할 때 도중에 내리거나 멈출 수 있는 데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차이를 될 수 있는 한 더 깊이 느끼게 하여, 우리 상상력이 단 한 번의 비약으로 살던 장소에서 욕망하는 장소 한복판으로 데려다 주듯이 우리 상념 속에 있던 차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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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일상/book 2018. 2. 20. 00:01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빅데이터/후쿠하라 마사히로 外/경향BP구글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라즐로 복/RHK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과 관련해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했는데, 이런 사실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 일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 일을 해본 경험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만들고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그때 나는 내 앞에 두 개의 길이 놓여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의 길은 내 팀과 동료를 더 잘 대우해주고 그들의 성과를 개선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따를 거라고 기대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의 길은 세상의 모든 기업이 직원들 대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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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I일상/book 2018. 2. 11. 23:15
인과관계란 가능한 거의 모든 결과를 만들어 내며, 따라서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도 만들어 낸다. 이 작업은 우리 욕망이나 삶 자체로 인해 더욱 느리게 진행되어 우리 욕망이나 삶이 멈추었을 때 비로소 실현된다.―p. 86 변하지 않을 내 취미와 내 삶을 행복하게 해 줄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아버지는 두 가지 무서운 의혹을 내 마음속에 심어 넣으셨다. 첫 번째는 (매일 나는 아직 속도 대지 않은 삶의 문턱에 있으며 내 삶은 다음 날 아침에야 시작되리라고 생각해 왔는데) 내 삶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게다가 뒤이어 올 삶도 지나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는 의혹이었다. 두 번째는 사실을 말하자면 첫 번째 의혹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시간' 밖에 있지 않고 소설 속 인물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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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일상/book 2018. 2. 7. 21:19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과제이자 잠재적 위대성은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또 어느 정도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산출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작업·행위·언어의 능력을 가진다는 데 있다. 그래서 죽을 운명의 인간은 이것들을 통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불멸하는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한다. 불멸적인 행위업적과 사라지지 않을 흔적을 뒤에 남기는 능력으로 인해―개별적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불멸성을 획득하고 스스로를 신적 본성을 가진 존재로 확증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 종 자체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을 항상 최고의 존재로 증명하고 사라질 것들보다 불멸의 명예를 좋아하는 가장 뛰어난 자만이 참된 인간이다. "자연이 제공하는 쾌락에 만족하는 자", 그는 동물처럼 살다가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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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과학―청각은 어떻게 마음을 만드는가?일상/book 2018. 1. 1. 16:45
잠시 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한마디로 귀는 분자들의 압력 변화를 감지하는 기관이다. 우리는 귀를 음악이나 자동차 경적을 듣는 곳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 귀가 감지하는 것은 진동이다. 초기의 척추동물들은 두 가지 목적에서 진동 민감성을 활용했다. 하나는 몸 주위를 지나는 유체 흐름의 변화를 살피기 위해서였는데, 이른바 측선이라는 것을 이용했다. 이는 지금도 거의 모든 물고기 및 양서류 유충에서 보인다. 두 번째는 머리의 양측에 각각 위치한 특수 기관들에서 '내부' 유체 흐름의 변화를 감지했다. 우리는 주위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현상을 실제로 보거나 듣거나 맛보거나 만진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한 유형의 에너지를 사용가능한 신호로 변환시킴으로써 세계의 표상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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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전집일상/book 2017. 11. 12. 19:31
왜 우리는 세상에 이 크나큰 빈 상자 속에 툭툭 채집되어야 했을까팽팽하게 얼어붙는 한 장 바람의 형상이 되어우우 어디로 가서 기댈까우리가 활활 소멸할 수 있는 미지의 불은 어디?우리는 도시의 끝, 그 바람만 줄달음치는 역사驛舍를 배회하였다.그러나 여객운임표로 할당되는 가난한 우리의 생.갈 곳은 황량한 도시뿐이었다. -거리에서 中 손에 집힐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펴들고 한 단락씩 곱씹어 읽는 책.기형도의 시에는 깊은 슬픔이 베어 있지만, 소리내어 읽으면 따듯함이 묻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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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스완네 집 쪽으로 II일상/book 2017. 10. 30. 00:03
어느 한 순간, 윤곽을 분명히 구별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 갑자기 매혹된 그는, 마치 저녁나절 습기 찬 공기 속을 감도는 장미 냄새가 우리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하듯이, 지나는 길에 그의 영혼을 크게 열어 준 악절 또는 화음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처럼 스완이 어떤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음악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인상은 오로지 유일하게 음악적이고 영역이 좁은, 다른 어떤 인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듣는 음은 그 높이와 장단에 따라 우리 눈앞에 있는 다양한 차원의 표면을 감싸고 아라베스크 무늬를 그리며 우리에게 넓이, 미묘함, 안정감, 변화에 대한 감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