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
별똥별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2. 12. 15. 17:03
# 간밤에 남쪽에서 올라온 먹구름이 이른 아침부터 눈을 쏟아내고 있다. 나는 어젯밤 하늘이 구름에 서서히 흐려져가는 걸 목이 빠져라 바라보았다. 한밤중 20분 남짓 쌍둥이자리 근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쌍둥이자리 근처에서 둘, 오리온자리 근처에서 하나를 발견했다. 그동안 몇 백 년만에 찾아온다는 우주쇼를 소개하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봐도, 내게는 그저 수많은 인간사와 스캔들 사이에 끼어든 작은 뉴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제 밤사이 유성우가 있을 거라는 글을 우연히 접한 순간, 곧장 점퍼만 둘러입고 밖을 나섰다. 마침 우주쇼가 있을 것으로 예정된 시각이었다. 최근 본가 근처에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집 앞에서 눈에 들어오는 하늘의 면적은 반의 반토막이 났고, ..
-
나의 사랑하는 생활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2. 10. 3. 12:37
나는 우선 아침 시간을 이용해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천오백 원짜리 가성비 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든, 오천 원짜리 풍미 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든, 아침 시간에 찾는 카페는 언제나 한적하다. 요즘은 수필을 곧잘 찾아 읽곤 한다. 이전에는 소설이나 역사 서적들도 잘 찾아보았지만 두꺼운 책에는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카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창가 쪽이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며 한낮의 열기가 서서히 올라오는 걸 바라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섯 살 난 강아지를 데리고 걷는 코스는 꼭 정해져 있다. 우리집 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 시원한 가로수길을 걷는다. 가로수길이 끝나는 지점에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 있다. 우리집 강아지는 보도블럭보다는 흙이 있는 길을 훨..
-
서울을 걷는다는 것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2. 8. 25. 23:06
[도시의 풍경] 서울의 풍경은 해를 거듭할 수록 발전하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대략 2002년 월드컵 때의 서울과 비교하자면, 지난 20년 사이 서울의 거리는 몰라볼 정도로 정갈하게 정비되었고 오래된 건물들은 새롭고 시원한 건물들로 대체되었다. 세종대로나 강남대로, 여의대로를 걷다보면 마천루가 즐비한 해외 유수의 도시가 부러울 게 없다. 성냥갑같던 아파트들도 근래에는 타워형 아파트로 바뀌면서 주거지의 풍경 또한 퍽 달라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보행습관] 아이러니한 점은 지난 10년간 사람들의 보행습관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는 것이다. 나날이 번듯해지는 도시의 외관과 달리,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보행습관은 때로 참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인도와 횡단보도를 사선으로 걷는 건 기본이거니와, 충돌..
-
능소화 떨어지던 날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2. 7. 8. 00:27
근래 몇 년 중 가장 장마다운 장마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에서 도착한 이후로 일주일 가까이 비가 내리고 잠시 날이 개이는 듯 싶더니, 다시 비 예보가 꽉꽉 들어찼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파리에 좀 더 오래 머무를 걸 그랬다는 괜한 아쉬움도 들지만, 몇 주 지나고 나면 파리야말로 서울보다 날씨가 더욱 더워질 것이다. 물론 서울의 찌는 듯한 더위와는 다르겠지만. 간밤에 내린 거센 비 때문에 여름 한철 대롱에 매달려 있어야 할 능소화가 우수수 떨어진 걸 오늘 아침 길을 걷다 발견했다. 낙화(落花)라고 하기에는 색깔과 모양이 퍽 소담스러웠다. 물기를 머금은 선명한 다홍빛에서 생(生)의 강렬함이 발산되는 것을 느낀다. 동시에 황망히 시들어가는 꽃송이들을 보면서 그러한 약동(躍動)이 맥없이 끊겨 버렸다는 ..
-
문턱에서(on the threshold)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12. 31. 12:57
햇수로 또 한 번의 문턱을 넘는다. 올 한 해도 또 하나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그 문턱을 넘는다고 더 이상 남다른 감회가 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편의로 만들어 놓은 문턱일 뿐이다. 올해는 내가 언젠가는 죽겠구나, 내 존재는 정말로 유한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편의상 인생의 3분의 1을 살았다고 한다면, 조금씩 남은 인생의 끝이 보이는 느낌이랄까. 걸어가는 길 저 멀리로 죽음이라는 성채가 꼭대기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일시정지 버튼 같은 게 공기 중에 불쑥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다. 잠시 멈추고 싶다. 많은 것을 챙겼지만, 많은 것을 잃었고, 결과적으로 이룬 것도 이루지 못한 것도 없이 바쁘게 살아온 것 같다. 내 ..
-
Ça brûle au fond de moi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12. 1. 22:55
내게 가장 두려운 것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리디큘러스 시범을 보이는 루핀 교수 앞에는 보름달이 나타난다. 보름달이 뜨면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루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다름아닌 보름달이다. 그와 마찬가지다. 내가 리디큘러스 수업에 들어간다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이 단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죽음’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다. 죽으면 내가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있음(有)도 없음(無)도 아닌 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인지, 내 존재의 크기는 얼마나 줄어드는 것인지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어서 두렵다. 앞으로의 ..
-
가을비 내리던 날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11. 4. 22:31
후둑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밖을 나설 때부터 비가 오려나보다 생각은 했지만, 어제와 다름없이 맑겠거니 별 고민 없이 걸음을 떼었다. 그런 걸 보면 생각보다도 행동에 습관이 더 깊이 배어드는 것 같다. 몸에 밴 습관은 물에 젖은 실타래보다도 떼어내기 어렵다. 다행히 한낮에 내리던 비는 두어 시간 내리고 그쳤다. 날이 완전히 개이지는 않았지만 더 비가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린 뒤 평소에 다니던 길을 빙 돌아서 걸어본다. 꿉꿉한 가을비가 지나가고 나니 올해 단풍을 보는 것도 거의 마지막이겠구나 싶었다. 가을이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한 해 동안 내가 걷던 길에 단풍나무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길가에 불그스름하게 잎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것들은 올봄 흐드러지게 흰꽃을 머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