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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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에서(on the threshold)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12. 31. 12:57
햇수로 또 한 번의 문턱을 넘는다. 올 한 해도 또 하나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그 문턱을 넘는다고 더 이상 남다른 감회가 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편의로 만들어 놓은 문턱일 뿐이다. 올해는 내가 언젠가는 죽겠구나, 내 존재는 정말로 유한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편의상 인생의 3분의 1을 살았다고 한다면, 조금씩 남은 인생의 끝이 보이는 느낌이랄까. 걸어가는 길 저 멀리로 죽음이라는 성채가 꼭대기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일시정지 버튼 같은 게 공기 중에 불쑥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다. 잠시 멈추고 싶다. 많은 것을 챙겼지만, 많은 것을 잃었고, 결과적으로 이룬 것도 이루지 못한 것도 없이 바쁘게 살아온 것 같다.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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Ça brûle au fond de moi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12. 1. 22:55
내게 가장 두려운 것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리디큘러스 시범을 보이는 루핀 교수 앞에는 보름달이 나타난다. 보름달이 뜨면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루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다름아닌 보름달이다. 그와 마찬가지다. 내가 리디큘러스 수업에 들어간다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이 단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죽음’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다. 죽으면 내가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있음(有)도 없음(無)도 아닌 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인지, 내 존재의 크기는 얼마나 줄어드는 것인지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어서 두렵다. 앞으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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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내리던 날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11. 4. 22:31
후둑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밖을 나설 때부터 비가 오려나보다 생각은 했지만, 어제와 다름없이 맑겠거니 별 고민 없이 걸음을 떼었다. 그런 걸 보면 생각보다도 행동에 습관이 더 깊이 배어드는 것 같다. 몸에 밴 습관은 물에 젖은 실타래보다도 떼어내기 어렵다. 다행히 한낮에 내리던 비는 두어 시간 내리고 그쳤다. 날이 완전히 개이지는 않았지만 더 비가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린 뒤 평소에 다니던 길을 빙 돌아서 걸어본다. 꿉꿉한 가을비가 지나가고 나니 올해 단풍을 보는 것도 거의 마지막이겠구나 싶었다. 가을이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한 해 동안 내가 걷던 길에 단풍나무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길가에 불그스름하게 잎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것들은 올봄 흐드러지게 흰꽃을 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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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安否)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8. 26. 13:54
꽤 거세게 비가 오는 날이었다. 지하철역 근처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승객들의 우산에서 흘러내린 빗물, 옷에 스민 물기로 버스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맡은 소임을 해야 한다는 듯 에어컨은 버스 안에 냉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내 옷차림—폴로 셔츠에 얇은 면바지—역시 한여름 복장으로, 우산을 썼는데도 비를 맞고 나니 마치 가을비에 젖은 것처럼 추웠다. 별 수 없이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뿌옇게 김이 서린 차창 밖을 넋놓고 바라본다. 버스 안 한기에 승객 모두 풀이 꺾인 것 같다. 그럼에도 완벽한 정적이란 없어서 어디선가 무거운 공기를 뚫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온다. 버스의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갔다 섰다를 반복하는 버스의 엔진 소리와 함께. 빗길 위 차창 밖을 바라보며 지루한 몽상에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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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 étoile me cache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6. 6. 23:20
소쩍새의 구슬픈 여름노래. 우레탄 코트 위로 통통 농구공 튀는 소리. 시내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내는 배기음. 누군가 발작적으로 까르르 내뱉는 웃음. 그리고 저 멀리 북극성, 아니 시리우스인가. 무언가 새하얀 점이 창밖에 아른거렸다. 별자리를 볼 줄 모르는 나는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을 발견하면 늘 북극성인지 시리우스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사는 곳을 지금 이곳으로 옮겨 온 뒤 3개월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침대 머리맡 창가에 밤하늘 별이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빛의 거리로 헤아려야 할 만큼 아주 멀리에 있는 저 별도, 가만히 응시하면 불처럼 이글거리는 것이 보인다. 별은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모양을 쉼없이 바꿔간다. 수천 년 전 밤하늘 위 별을 올려다보며 숨은 뜻을 헤아리던 옛사람들을 이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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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신촌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4. 20. 00:20
어느덧 봄이 무르익어 진자(振子)운동을 하듯 서늘한 바람과 따듯한 바람이 낮밤으로 오락가락하던 것도 점차 따듯한 기운으로 기울어 간다. 덩달아 아직은 스산한 바람이 더 머물러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봄이 되었다는 것은 이사철이 되었다는 것이고 채 2년이 되지 않은 신촌 생활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벌써 크고 작은 짐들을 세 차례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왔고, 이제는 용달차를 구해서 처분하지 않은 큰 가구들을 본가로 보낼 일만이 남았다. 사실 지금의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기로 한 건 지금에 와서는 대단히 만족하지만, 그렇게 결정하기 전까지는 좀체 내키지 않았다. 신촌에 두고 와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방안에 있는 물건들은 이삿짐으로 부칠 수 있다. 하지만 신촌에 머무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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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대하는 감각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4. 8. 01:52
# 보다1. 근 10일 동안 벗꽃을 실컷 보다. 살면서 벚꽃을 이렇게 원없이 보는 것도 처음인 듯하다. 시국이 시국임을 감안하면 감사한 일이다.2. 을 보다. 아직까지는 이 내게는 베스트다. 이 업버전된 느낌. # 듣다Moha la squale의 신곡 Amsterdam을 듣다. 특유의 저항적인 목소리가 마음에 듦. 화사한 봄풍경을 깡그리 짓이기는 멜로디. #읽다출애굽기를 읽다. 후반부에 예식(禮式)을 지시하는 데 꽤 많은 비중이 할애돼 있다. 이거 유교(儒敎)랑 비슷한 느낌인데?! #쓰다부르디외에 관한 페이퍼를 쓰다. 3차원? 장(champs)? 이걸 어디에 어떻게 써먹지.코딩언어를 쓰다. 재미있는 듯 어려운 아리송함. 다른 작업들 보면서 점점 감 익히는 중. #말하다불평등에 대해 말하다. 불평등에 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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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m'en fous pas mal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3. 21. 22:46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George Bernard Shaw # 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1844) 「신성가족: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판」(1844) 「공산당선언」(1848) 「철학의 빈곤」(1847)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1-52) 「자본론」(1867) 「독일 이데올로기」(1845-46) # 소유욕에 관한 첫 번째 기억 3학년이 되어 전학을 가기 전까지 처음으로 다녔던 초등학교는 일제에서 해방된 같은 해에 설립되어 공립으로 운영되는 학교였다. 빨간 벽돌에 베이지색 페인트칠을 더한 매우 낡은 외관을 하고 있던 학교는 운동장만큼은 손색 없이 넓은 곳이었다. 어쨌든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