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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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웠던 나날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2. 28. 02:33
2월 중순, 며칠 동안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날이 있었다. 종종 한 생각에 꽂히면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에 대해, 또 어떤 때는 새로이 시작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며 잠을 설치곤 한다. 2월 중순 내 머리를 꽉 채웠던 것은 혼자임에 대한 절망 같은 것이었다. 어떤 인간 관계로도 끝내 어루만질 수 없을 것 같은 내 안의 밑바닥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닿지 않는 심해에 잠겨 있어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았던 미확인 생물체처럼 마음 속 심연이 예고 없이 떠올랐다. 다만 이 발견에는 기쁨을 대신해 절망이 있었을 뿐이다. 그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던 심연을 비겁하게 외면해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기억을 하나둘 되뇌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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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몰렸다면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2. 20. 07:03
L'homme n'est pas fait pour penser toujour. Quand il pense trop, il devient fou. (George Sand) 어떤 초원에 있었다. 풀포기도 조금 있었고 몇 그루 되지 않는 나무도 있었다. 황톳빛 성긴 모래알들이 메마른 땅 위에 별뜻없이 흩어져 있었던 것 같다. 지평선도 해안선도 보이지 않는 곳에 고립무원(孤立無援)으로 서 있었다. 수풀이 바람결에 아주 느리게 흔들렸고 바람이 부는 소리도 아스라이 들렸지만, 살아 있는 것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하늘은 아무런 색깔도 띠지 않았다. 차라리 여기가 벼랑 끝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깎아지르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눈을 질끈 감고 경계 너머 망각 속으로 내달릴 수 있었으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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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마지막 일기 : Festina lente!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12. 31. 10:08
#1. 불완전한 자유 말뚝에 단단하게 고정된 족쇄에 발목이 묶여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발목에 족쇄는 남아 있지만 이제는 말뚝에서 벗어나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2. Schadenfreude[불편한 기쁨] —인간의 오만함에 대하여 전염병이 돌 때마다 몰살되는 수천 수만 마리의 가축들, 생활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실험용 비글들과 안락사되는 유기견들, 유전자를 조작한 농산물들, 핵폐기물과 원전에서 바다에 내보내는 냉각수,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를 한껏 투여한 가금류들, 온갖 정체 모를 원산지가 뒤범벅된 음식물 쓰레기들, 분리되지 않은 채 함부로 버려지는 처방약들, 하수구를 통해 모여드는 대도시의 배설물들, 화학처리를 거치지 않고 지역하천으로 흘러드는 공장폐수, 화석연료에서 배출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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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dernière saison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12. 4. 17:00
# 천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 이 즈음 나무를 들여다 보면, 어떤 가지는 이미 앙상하게 말라 비틀어진 잎사귀를 꽁꽁 붙들어매고 있고 어떤 가지는 여름 빛깔이 가시지 않은 잎사귀를 거느리고 있다. 대부분은 잎이 남아 있지 않은 잔가지들이지만, 더러 이미 새 잎을 틔울 채비에 들어간 나뭇가지도 있다. 한스 카스토르프의 말대로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장치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같은 공간에 그대로 있지만 서로가 점유하는 시간은 짧거나 길기도 하고 빠르거나 느리기도 하다. 어느덧 올해의 마지막 계절도 점점 그 중심으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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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버리기(棄棄)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11. 24. 01:22
요즘은 딱히 기록으로 남길 만한 일상이랄 게 없다. 몇 달 전 본가의 내 방을 대대적으로 청소할 일이 있었다. 집이 오래되다보니 난방시설을 수리하기 위해 몇 가지 가구도 들어내야 했다. 방을 정리할 때 늘 골칫거리는 방에 진열된 많은 책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크고 작게 수시로 정리를 하는데도 정리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래되고 부피만 차지하는 가구들도 과감히 버리면서 책들도 본격적으로 솎아냈다. 별의 별 책들이 있다. 취업 대비로 사두었던 각종 수험서, 어학 수험서, 전집, 초등학교 교과서, 대학교에서 쓰던 두꺼운 사회과학 서적들. 나중에는 솎는 작업도 귀찮아서 제목만 대충 훑어보고 버릴 것을 분류했다. 좀 더 착실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알라딘에 중고품으로라도 내놓았겠지만, 여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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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I stand for you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9. 30. 20:53
#1. 부모님과 동생을 동대문 시장 방면으로 보내고 나는 광화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종로5가와 을지로4가 사이의 오래된 가게에서 소고기를 사드리고 나오는 길이었다. 추석 직전이기도 했지만 원래 모임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는데, 몇 가지 의견이 안 맞아서 좀 어정쩡한 점심식사를 했다. 며칠간 이어진 두통을 누르며 걸음을 내딛었다. 한동안 청계로를 따라 걷는데 세운상가를 가로지른 이후부터 을지로 방면으로 고층 빌딩들이 한창 지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동안 을지로 쪽에 높은 빌딩이 꽤 들어섰었는데, 계속해서 새 건물이 올라가는 모양이다. 활기가 사라져가는 도심을 새로이 개발하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건물의 파사드를 빈틈없이 채운 진부한 유리창을 보며 어떤 것이 정말 활력을 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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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끝자락의 기록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8. 21. 00:05
# 8월 길고 긴 장마가 끝나기 전의 일이다. 잠깐 볼 일이 있어 고등학교에 갔다가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벌써 10년 넘게 흘렀는데 정말로 신기할 만큼 예전 모습 그대로셨고, 정작 나를 보고 이름을 못 떠올리시면서도 소녀처럼 엄청 반가워하셨다. 나를 보면서 예전 모습 그대로라고 하시는데 나는 아직 젊은 나이니까 달라져봐야 얼마나 달라졌겠나, 연세가 있는 선생님이야말로 그대로인 게 더 놀랍다는 생각. 졸업앨범을 열어보며 한 시간 가량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종종 연락도 드릴 겸 휴대전화 번호도 교환했다. 반갑다는 인삿말로 집에 돌아와 메시지를 남겼는데, 뒤이어 선생님에게 긴 메시지 하나가 왔다. 내가 기억하는 너는 아주 착하고 성실한 아이이고…… 착하고 성실한 게 미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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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안팎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7. 15. 00:30
우리가 좋은 삶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큼 좋은 죽음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눈다면 어떨까? 행복한 일상, 삶에서 우선순위를 세우는 방법, 자신을 챙기는 방법, 이기는 습관에 이르기까지 삶을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여러 자기계발서를 통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삶(Eudaimonia)’이라는 것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부터 철학에서도 이미 오래된 화두였으니까.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다. 죽음을 다룬 철학자 또는 사회과학자로 떠오르는 건 내게는 쇼펜하우어와 뒤르켐 정도다. 내세에서의 구원을 약속하는 성경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가까운 현세에 관한 것들이다. 안락사 문제를 다룰 때도 허용된 살인행위냐 인간의 존엄성 문제냐가 첨예한 논점이 된다.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사람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