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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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安否)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8. 26. 13:54
꽤 거세게 비가 오는 날이었다. 지하철역 근처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승객들의 우산에서 흘러내린 빗물, 옷에 스민 물기로 버스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맡은 소임을 해야 한다는 듯 에어컨은 버스 안에 냉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내 옷차림—폴로 셔츠에 얇은 면바지—역시 한여름 복장으로, 우산을 썼는데도 비를 맞고 나니 마치 가을비에 젖은 것처럼 추웠다. 별 수 없이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뿌옇게 김이 서린 차창 밖을 넋놓고 바라본다. 버스 안 한기에 승객 모두 풀이 꺾인 것 같다. 그럼에도 완벽한 정적이란 없어서 어디선가 무거운 공기를 뚫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온다. 버스의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갔다 섰다를 반복하는 버스의 엔진 소리와 함께. 빗길 위 차창 밖을 바라보며 지루한 몽상에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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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 étoile me cache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6. 6. 23:20
소쩍새의 구슬픈 여름노래. 우레탄 코트 위로 통통 농구공 튀는 소리. 시내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내는 배기음. 누군가 발작적으로 까르르 내뱉는 웃음. 그리고 저 멀리 북극성, 아니 시리우스인가. 무언가 새하얀 점이 창밖에 아른거렸다. 별자리를 볼 줄 모르는 나는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을 발견하면 늘 북극성인지 시리우스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사는 곳을 지금 이곳으로 옮겨 온 뒤 3개월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침대 머리맡 창가에 밤하늘 별이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빛의 거리로 헤아려야 할 만큼 아주 멀리에 있는 저 별도, 가만히 응시하면 불처럼 이글거리는 것이 보인다. 별은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모양을 쉼없이 바꿔간다. 수천 년 전 밤하늘 위 별을 올려다보며 숨은 뜻을 헤아리던 옛사람들을 이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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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신촌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4. 20. 00:20
어느덧 봄이 무르익어 진자(振子)운동을 하듯 서늘한 바람과 따듯한 바람이 낮밤으로 오락가락하던 것도 점차 따듯한 기운으로 기울어 간다. 덩달아 아직은 스산한 바람이 더 머물러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봄이 되었다는 것은 이사철이 되었다는 것이고 채 2년이 되지 않은 신촌 생활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벌써 크고 작은 짐들을 세 차례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왔고, 이제는 용달차를 구해서 처분하지 않은 큰 가구들을 본가로 보낼 일만이 남았다. 사실 지금의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기로 한 건 지금에 와서는 대단히 만족하지만, 그렇게 결정하기 전까지는 좀체 내키지 않았다. 신촌에 두고 와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방안에 있는 물건들은 이삿짐으로 부칠 수 있다. 하지만 신촌에 머무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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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대하는 감각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4. 8. 01:52
# 보다1. 근 10일 동안 벗꽃을 실컷 보다. 살면서 벚꽃을 이렇게 원없이 보는 것도 처음인 듯하다. 시국이 시국임을 감안하면 감사한 일이다.2. 을 보다. 아직까지는 이 내게는 베스트다. 이 업버전된 느낌. # 듣다Moha la squale의 신곡 Amsterdam을 듣다. 특유의 저항적인 목소리가 마음에 듦. 화사한 봄풍경을 깡그리 짓이기는 멜로디. #읽다출애굽기를 읽다. 후반부에 예식(禮式)을 지시하는 데 꽤 많은 비중이 할애돼 있다. 이거 유교(儒敎)랑 비슷한 느낌인데?! #쓰다부르디외에 관한 페이퍼를 쓰다. 3차원? 장(champs)? 이걸 어디에 어떻게 써먹지.코딩언어를 쓰다. 재미있는 듯 어려운 아리송함. 다른 작업들 보면서 점점 감 익히는 중. #말하다불평등에 대해 말하다. 불평등에 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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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m'en fous pas mal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3. 21. 22:46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George Bernard Shaw # 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1844) 「신성가족: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판」(1844) 「공산당선언」(1848) 「철학의 빈곤」(1847)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1-52) 「자본론」(1867) 「독일 이데올로기」(1845-46) # 소유욕에 관한 첫 번째 기억 3학년이 되어 전학을 가기 전까지 처음으로 다녔던 초등학교는 일제에서 해방된 같은 해에 설립되어 공립으로 운영되는 학교였다. 빨간 벽돌에 베이지색 페인트칠을 더한 매우 낡은 외관을 하고 있던 학교는 운동장만큼은 손색 없이 넓은 곳이었다. 어쨌든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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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웠던 나날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2. 28. 02:33
2월 중순, 며칠 동안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날이 있었다. 종종 한 생각에 꽂히면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에 대해, 또 어떤 때는 새로이 시작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며 잠을 설치곤 한다. 2월 중순 내 머리를 꽉 채웠던 것은 혼자임에 대한 절망 같은 것이었다. 어떤 인간 관계로도 끝내 어루만질 수 없을 것 같은 내 안의 밑바닥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닿지 않는 심해에 잠겨 있어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았던 미확인 생물체처럼 마음 속 심연이 예고 없이 떠올랐다. 다만 이 발견에는 기쁨을 대신해 절망이 있었을 뿐이다. 그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던 심연을 비겁하게 외면해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기억을 하나둘 되뇌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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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몰렸다면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1. 2. 20. 07:03
L'homme n'est pas fait pour penser toujour. Quand il pense trop, il devient fou. (George Sand) 어떤 초원에 있었다. 풀포기도 조금 있었고 몇 그루 되지 않는 나무도 있었다. 황톳빛 성긴 모래알들이 메마른 땅 위에 별뜻없이 흩어져 있었던 것 같다. 지평선도 해안선도 보이지 않는 곳에 고립무원(孤立無援)으로 서 있었다. 수풀이 바람결에 아주 느리게 흔들렸고 바람이 부는 소리도 아스라이 들렸지만, 살아 있는 것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하늘은 아무런 색깔도 띠지 않았다. 차라리 여기가 벼랑 끝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깎아지르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눈을 질끈 감고 경계 너머 망각 속으로 내달릴 수 있었으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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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마지막 일기 : Festina lente!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12. 31. 10:08
#1. 불완전한 자유 말뚝에 단단하게 고정된 족쇄에 발목이 묶여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발목에 족쇄는 남아 있지만 이제는 말뚝에서 벗어나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2. Schadenfreude[불편한 기쁨] —인간의 오만함에 대하여 전염병이 돌 때마다 몰살되는 수천 수만 마리의 가축들, 생활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실험용 비글들과 안락사되는 유기견들, 유전자를 조작한 농산물들, 핵폐기물과 원전에서 바다에 내보내는 냉각수,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를 한껏 투여한 가금류들, 온갖 정체 모를 원산지가 뒤범벅된 음식물 쓰레기들, 분리되지 않은 채 함부로 버려지는 처방약들, 하수구를 통해 모여드는 대도시의 배설물들, 화학처리를 거치지 않고 지역하천으로 흘러드는 공장폐수, 화석연료에서 배출되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