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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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와 덤불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8. 10. 23. 23:26
# 문득 떠오른다. 대학교 2학년 때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회색인간이야. 헤르만 헤세의 책에 빠져 그의 작품에 대해 얘기하던 중이었다. 뜬금없이 회색인간? 너는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고 강건너 불구경하는 거 좋아하는 타입이거든. 결코 무엇도 하지 않지. 그게 그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였던 것 같다. 간사이 여행도 함께 할 만큼 믿음이 갔던 친구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간 뒤로, 친구와 제대로 나눈 마지막 대화는 아직도 종종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이후 5년 뒤인가 우연히 영화관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그 친구를 마주했을 때 나는 짤막한 인사만을 남기곤 황급히 갈길을 재촉했었다. 그때는 아무런 예고없이 수년간 친교(親交)를 끊어버린 그 친구에 대한 서운함이 우연히 찾아온 반가움을 반사적으로 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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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찾는가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8. 4. 1. 16:25
A veces yo pienso, "¿que tengo hacer por ser feliz?"#1가끔 아무런 까닭없이 마음이 텅 비어.마음속 빈 공간만큼 무언가 채워야 할 텐데,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폭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허기진 속을 끝없이 채우려 했던 것인지도 몰라.그리곤 방금 전까지 목으로 넘긴 걸 게워내곤 하는 거지.뭐든 적당함이란 것이 없어.적당하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거든.폭발적인 섭식, 이어지는 구토, 밑바닥까지 휑해진 내장(內臟), 혓바닥, 그리고 마음.도대체 내 마음의 양식(良食)은 어디서 찾을거나. #2상식(常識).늘 알아두어야 하는 것.나는 지금 어떤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야,정말 단순한 에티켓을 말하는 거야.어른이 되고 보니 상식과 달리 흘러가는 상황을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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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비현실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8. 1. 21. 13:06
토요일 햇빛조차 흐릿한 대낮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 낮잠에 빠졌다. 그리고 희한한 꿈들을 꿨다. #1 나는 J와 카자흐스탄을 여행하고 있었다. 지하자원으로 큰 돈을 벌어들인 카자흐스탄의 도시는 기대했던 것보다 휘황찬란했다. 비록 근교로 조금만 나가도 황량만 민둥산이 쭈뼛쭈뼛 볼품없이 낯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몇몇 한국인 관광객도 만났는데, 희한하게도 적의에 찬 시선을 보내는 현지인들도 있었다. 내가 왜 이런 사람들과 엮였는지 까닭은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J와 나는 미로 같은 구조의 상가 건물에서 우왕좌왕 탈출구를 찾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막다른 골목들 뿐이었다. #2 나는 미국의 어느 커다란 합숙소에 와 있다. 어쩐지 총격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찻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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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즈음에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7. 11. 9. 00:16
늘 머리를 떠나지 않는 몇 가지들.. 삶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사명감. 끝모를 외로움, 소외감, 그리고 소리없는 몸부림. 도돌이표를 찍는 괴로움, 어수룩한 표정과 몸짓들. 천근만근 어깨를 짓누르는 목표설정, 힘겹다 못해 이탈 직전에 놓인 과정들. 그럼에도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전혀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해서 이상할 것 또한 없는 지금의 삶. 과밀한 삶 속에서 때로 멍한 눈초리로 세상을 바라본다. 어떤 때는 잠시 한 마리 짐승이 되었다 느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정신이 뜨였을 때 수면 위로 올라오는 슬픔. 삶은 아름답지만 참 슬프기도 하다. 삶은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 삶이라는 노정은 결국 정의를 다듬어가는 여행길일 터. 아마 나는 끝끝내 내 삶을 정의하지 못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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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즙(搾汁)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7. 6. 12. 03:36
뿌리가 퍽퍽한 토양으로부터 희박한 수분을 빨아들인다. 뿌리는 물을 찾아 가녀린 잔뿌리로 처절하게 흙을 더듬고 있겠지. 줄기를 지탱해야 할 이랑의 흙더미는 메마른 먼지가 되어 흩어진지 오래된 듯, 식물의 밑동은 건조한 열기에 맨몸을 휑하니 드러낸 채로 줄기라는 것을 떠받친다. 그나마 땅위로 솟아나온 줄기는 거꾸로 서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볼품없이 뻗어 있다. 듬성듬성 가지에 남은 잎사귀들―남은 잎사귀보다 떨어진 잎사귀가 더 많은데 이랑의 흙더미와 마찬가지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빛바랜 누런 색을 띠고 있다.광합성은 제대로 할는지 이 식물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채 여물지는 않았으되 야윈 열매들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완연히 무르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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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생각을 좀먹다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7. 4. 18. 23:22
하루는 모든 인풋을 멈추어 보았다 즐겨듣는 mp3 음악감상,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공부, 운동, 독서, 모두 다 내키지 않는 하루였다 입시, 스펙쌓기, 군복무, 이제는 취업단계다 그간 나름대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왔다 다음으로 내게 인풋될 명령어는 무엇일까 결혼? 승진? 노후대비? 뭐 하나씩 스테이지를 완파해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그런데 왜 이리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느낌일까 발가락이 꽉 껴서 아프다 100km 행군을 하고나서 왼발 넷째 발가락의 발톱이 기이하게 휘어져 버렸는데 되돌아오질 않는다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발톱을 깎을 때마다 일그러진 발톱을 되돌리고 싶은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내게 주어질 다음 명령어는 무엇일까 내 삶이 그 발톱처럼 되어가고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