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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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편의 스페인 영화일상/film 2020. 1. 25. 00:58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몇 초 동안 화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육감적으로 마블링된 패턴을 배경과 함께 포문을 여는 영화는, 뒤이어 코발트 빛 풀장의 수면 아래로 멍하니 눈을 뜬 채 부유浮遊하는 한 남자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마침내 수면 위로 고개를 젖힌 남자—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시선은, 빨래터에서 물을 긷는 아낙네—꼬마 살바도르의 어머니(페넬로페 크루스)가 등장한다—들을 그리는 장면과 엮인다.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페넬로페 크루스라니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페넬로페 크루스는 어느 순간에 나이듦이 멈춰버린 것 같다=_=) 대단히 자전적自傳的인 영화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공감할 포인트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이 이야기가 자신의 삶을 그리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서 깨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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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영화 두 편 : 두꺼비와 어느 영웅일상/film 2020. 1. 24. 01:51
이라는 작은 규모의 영화제를 찾아 오랜만에 서울아트시네마에 들렀다. 이탈리아 영화를 보는 것 역시 참 오랜만인데, 다양한 영화를 보여주는 이런 영화관의 존재가 감사하게 느껴진다. 이런 영화제 소식은 한국에 살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일지라, 과연 관객석에는 이탈리아 사람들도 보였다. 이 이라는 영화는 2019년 베니스 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진출한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거창한 제목에 큰 기대를 건 것일까 너무 피상적이고 아무런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뭐 하나 제대로 파고든 게 없는 영화였는데, 가장 거슬렸던 장면은 미국식 교육환경에서 자라난 피에르파올로(루카 전처의 아들)가 이탈리아어를 배우러 로마에 온 아일랜드 유학생 마리안느에게 다짜고짜 '이탈리아는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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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화 두 편 : 얼룩말과 페르소나일상/film 2020. 1. 23. 02:55
모처럼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를 봤다. 영화 는 아동성추행을 지속해온 어느 사제에 대한 고발을 다루는 이야기로, 호평 가운데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다. 영화를 보게 된 것―개인적으로 종교적인 색채가 가미된 영화를 좋아하진 않는다―도 그런 높은 평가의 영향이 크다. 관능미 넘치는 영화를 줄곧 제작해왔던 프랑수아 오종이 픽션에 기반한 사회고발적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도 관심을 끌었지만 말이다…… 앞서 말한 영화의 소재―아동성추행을 지속해온 사제와 이를 묵인해온 카톨릭 교계―는 미국영화 를 떠올리게 하는데, 접근 방식은 두 영화가 정반대이다. 는 교단의 폐부를 파헤치기 위해 기자들이 문제를 발굴하고 이슈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에서는 피해자들이 직접 발벗고 나서서 범행을 저질러왔던 한 사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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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켓과 부츠와 바지와 장갑과 모자일상/film 2020. 1. 17. 13:08
새해 첫 픽은 이다. 영상화면에 비친 장 뒤자르댕Jean Dujardin의 매력적인 미소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화제목 때문에, 일찍부터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던 영화였는데 상영관도 많지 않고 그마저도 시간이 맞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얼마 전 작심하고 영화를 관람했다. 장르도 모르면서 프랑스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봤는데, 크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압도하는 영화다. 이와 비슷한 프랑스 영화로는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와, 마찬가지로 기괴스럽기 짝이 없는 줄리아 듀코나우 감독의 가 떠오른다. 그래도 만큼 살벌한 영화는 아니고, 정도의 달콤살벌(?)한 무드가 이어진다. 또한 장총을 메어 들고 겨울숲으로 사냥을 떠나던 어느 프랑스 영화―삽입곡이었던 Fleetwood Mac의 가 무척 잘 어울렸다―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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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빈(Fin-de-siècle Vienna)일상/book 2020. 1. 16. 00:01
사놓은지 매우 오래된 책이다. 군대에 복무하던 5~6년 전쯤 샀을까. 무슨 취향에서였는지 이런 유(?)의 하드커버지로 된 인문학 서적을 한동안 사들인 적이 있다. 먼지도 먹지 않은 채 잠자코 책장에 들어앉아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를 이 책을,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를 읽고난 뒤에야 비로소 떠올렸다. 처음에는 읽기 버거운 책도 어느새 슉슉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인물을 중심으로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예술, 건축, 문학, 음악을 아울러 서술하는 이 책은 읽으면 읽을 수록 흥미로웠다. 사실 익숙한 오스트리아 인물이라 해봐야 프로이트 정도인데, 그마저도 (어처구니 없게도) 해당 파트가 20 페이지 정도가 분실되어 있어서 정작 프로이트에 관한 내용은 제대로 읽을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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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일상/book 2020. 1. 15. 01:30
안타깝게도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그리 진득한 사람은 아니다. 특히 예술에 대한 관심사나 문학적 취향이 그러하다. 대체로 한번 책을 집어들면 심취하는 편이지만, 그렇다 해서 모든 글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뭐라 표현을 해야할지…) 유달리 문체가 마음에 드는 작가들이 있는데, 페르난두 페소아가 그러하고, 바로 이 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그러하다. (그런 감성을 전달받기 위해서는 물론 번역도 중요하다) 일전에 톨스토이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 『안나 카레리나』를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 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까닭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담고 있는 명징한 주제의식―변혁기의 19세기 러시아 사회에 대한 통렬한 문제의식과 인간 본성에 대해 예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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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일상/book 2020. 1. 3. 09:58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라는 마지막 구절과 함께 매듭을 짓는 이 소설은, 분명 다른 스토리이긴 하지만 비꼬는 투(sarcastic)의 문체가 박지원의 을 떠올리게 한다. 특권층의 허례허식과 민낯을 우회적으로 폭로하는 과 마찬가지로, 에서는 순진한 낙관주의가 맞닥뜨리는 현실에 대해 허무맹랑할 정도로 거침없이 그려낸다. 어느 귀족 집안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캉디드(Candide)라는 인물은 성채에서 쫓겨난 뒤 퀴네공드 공주를 찾아 콘스탄티노플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한 여정을 겪는다.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내는 방식을 불사하면서까지 이야기를 전개하는 볼테르의 의도는 무엇일까. ‘캉디드(Candide)’라는 말처럼 우리는 천진(天眞)한 마음으로 낙관주의를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라이프니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