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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수와 몸일상/book 2022. 10. 11. 22:02
모처럼 읽은 독일문학이다. 근대 독일문학이라고 하면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일관되고 선악(善惡)의 구분도 선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열두 편의 짤막한 소설로 엮인 『무용수와 몸』의 등장인물들은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나 있다. 길지 않은 글 안에서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편집증적이고 병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논리가 다음에 어느 방향으로 튈지 가늠하기 어렵다. 타이틀로 쓰인 『무용수와 몸』도 무용수 자신의 육체를 낱낱이 해부한다는 점에서 강한 인상을 주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민들레꽃 살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공원을 산책하던 한 중년 신사가 길 위에서 발견한 한 송이 민들레꽃을 지팡이로 뭉텅 날려버린 사소한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무심코 저지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의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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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읽기 (feat. <아멜리에>)주제 있는 글/Second Tongue 2022. 10. 10. 23:23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아르튀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 자크 프레베르의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 스테판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대형서점의 서가 앞에 서서 책들을 한참 뒤적이다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무지 프랑스어를 연습할 만한 마땅한 시집은 보이지 않고, 올해 말 내가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건 독서가 아닌 논문 쓰기가 아니었던가. 나는 짧은 문장으로 완성되는 시(詩)라면 프랑스어를 간단히 연습하기에 수월할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우리말과 프랑스어 원문이 함께 실린 시집의 문장들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시에 쓰인 프랑스어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한참을 서가 앞에서 서성이다가 빈손으로 서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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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하일상/book 2022. 10. 9. 23:56
역대기(歷代記)는 이름이 함축하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역대 역사를 연대기순으로 정리한 글이다. 아담에서 출발해 유다 왕국의 멸망까지 다루지만, 창세기에서 다윗 왕에 이르는 이야기는 아주 간략하게 다뤄진다. 솔로몬 왕에서부터 각 왕의 공과(功過)를 줄줄줄 서술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읽는 데 무미건조한 감이 있다. 그래도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역대기를 읽으면서 당시 중동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국제 정세를 추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에티오피아의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았던 것이나, 유다 왕국이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멸망된 사건, 바빌론을 정복한 페르시아가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했던 일은 당시 유프라테스 강 일대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앞으로 다가올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를 미리 짐작할 수 있게 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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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의 독서일상/book 2022. 10. 8. 12:03
# 김훈의 『풍경과 상처』: 『저만치 혼자서』라는 김훈의 단편소설집을 읽고 그의 수필이 읽고 싶어졌다. 『저만치 혼자서』는 단편소설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작가가 ‘군말(에필로그)’에 덧붙이고 있듯이 이야기 하나하나가 구체적인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그런 그가 삶의 체험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어떤 글이 나올지 궁금했다. 비교적 근래에 나온 수필집으로 2015년에 나온 『라면을 끓이며』이라는 수필집이 있는데, 이 책의 경우 다른 책을 통해 이미 출간됐던 산문들이 다수 엮여져서 중복되는 것이 많다는 서평을 보았다. 김훈의 글을 제대로 음미하고 싶었던 나는 전작들을 더 찾아보다가 『풍경과 상처』라는 기행문을 택하게 되었다. 기행문이라고는 하지만 풍경에 대한 관찰보다는 사유(思惟)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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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생활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2. 10. 3. 12:37
나는 우선 아침 시간을 이용해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천오백 원짜리 가성비 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든, 오천 원짜리 풍미 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든, 아침 시간에 찾는 카페는 언제나 한적하다. 요즘은 수필을 곧잘 찾아 읽곤 한다. 이전에는 소설이나 역사 서적들도 잘 찾아보았지만 두꺼운 책에는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카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창가 쪽이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며 한낮의 열기가 서서히 올라오는 걸 바라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섯 살 난 강아지를 데리고 걷는 코스는 꼭 정해져 있다. 우리집 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 시원한 가로수길을 걷는다. 가로수길이 끝나는 지점에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 있다. 우리집 강아지는 보도블럭보다는 흙이 있는 길을 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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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因緣)일상/book 2022. 10. 2. 11:17
파리의 하늘은 변하기 쉽다지요. 여자의 마음 같다고. 그러나 구름이 비치는 것은 물의 표면이지 호수의 깊은 곳은 아닐 것입니다. 날이 흐리면 머리에 빗질 아니하실 것이 걱정되오나, 신록 같은 그 모습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p. 31 양복 바지를 걷어 올리고 젖은 조가비를 밟는 맛은, 정녕 갓 나온 푸성귀를 씹는 감각일 것이다. —p. 47 맛은 감각적이요, 멋은 정서적이다. 맛은 적극적이요, 멋은 은근하다. 맛은 생리를 필요로 하고, 멋은 교양을 필요로 한다. 맛은 정확성에 있고, 멋은 파격에 있다. 맛은 그때뿐이요, 멋은 여운이 있다. 맛은 얕고, 멋은 깊다. 맛은 현실적이요, 멋은 이상적이다. 정욕 생활은 맛이요, 플라토닉 사랑은 멋이다. —p. 71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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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일상/book 2022. 9. 27. 15:07
‘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zing anyone,’ he told m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p. 7 Yet high over the city our line of yellow windows must have contributed their share of human secrecy to the casual watcher in the darkening streets, and I saw him too, looking up and wondering. I was within and without, simultaneously en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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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일상/book 2022. 9. 18. 11:06
수평선은 인간의 목측이 자진(自盡)하는 한계선이다. 인간의 시선이 공간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죽어갈 뿐, 하늘과 땅이 닿을 리는 없는 것이다. —p. 39 나는 교회의 첨탑이나 사찰의 석탑이 견딜 수 없이 답답하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곳이 자유나 초월적 가치라 하더라도 그 자유를 그토록 간절히 지향해야 하는 긴장과 자기 학대를 나는 견디어내지 못한다. 내 고향의 수직구조물들은 이제 신성이나 초월적 가치를 모두 버렸다. 그것들은 신석기의 선돌이나 중세의 첨탑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제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p. 106 그 정신주의는 행려와 표랑, 세상으로부터의 겉돌기와 헤매기, 외로움과 막막함, 눈물과 고통과 그리움에 의해 매우 잘 절여진 것이어서, 정신주의는 승천하지 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