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맹동산, 바람을 모으는 곳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4. 3. 18:27
영양에 왔으니 영양이 궁금하다. 그렇게 해서 영덕을 가기에 앞서 들른 곳이 맹동산 일대에 자리잡은 영양 풍력발전소다. 숙소가 위치한 입암면으로부터 직선거리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풍력발전단지까지 가는 데 한 시간 남짓 시간이 걸렸다. 이 일대는 사과 농사가 잘 되는지 어딜 가도 사과 나무가 흔하다. 나이가 어린 사과나무들은 한창 손질을 받고 있는 듯 모양이 제각각이고, 다 자란 사과나무들은 여러 개의 와인잔을 찍어낸듯이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겨울 산책」에서 데이비드 소로가 찬탄했던 개성 있는 야생사과와는 거리가 멀다. 저마다 재능이 다른 아이들이 평범한 어른이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고장에 온 이상, 이날 오후 영덕에서 청송으로 가는 길에 국도변..
-
영덕(盈德)은 바다다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3. 29. 01:17
국도를 운전하는 것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영양에는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 하더라도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잡아먹는다. 맹동산 풍력발전단지를 거쳐 영덕으로 가는 데는 도합 두 시간 가량이 걸렸다. 국도 옆으로는 이 지역의 특산품인 사과나무의 맨들맨들한 나뭇가지마다 한낮의 뙤약볕이 흐릿하게 부딪친다. 병에 걸린 손가락처럼 마디가 굵은 나뭇가지에는 열매도 잎사귀도 남아 있지 않다. 국도를 운전할 때는 이런 크고 작은 풍경들을 마주하는 것이 정겹다. 주마간산으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리 일행은 강구항으로 곧장 가는 대신 영덕군의 북쪽에 자리잡은 오보리 쪽으로 빠져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여기에는 어쩐지 번화한 곳..
-
영양(英陽)에 머물며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3. 5. 03:20
2월초 진관동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것이, 2월말이 되면 무대를 영양으로 옮긴다. 조금씩 위치가 다르기는 하지만 경상북도에는 유난히 ‘영’이라는 말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영양, 영덕, 영주, 영천. 별 건 아니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이 네 곳 모두 다 다른 한자를 쓴다는 점이다. 英陽, 盈德, 榮州, 永川. 직접 차를 몰아 도착했던 영양은 원래 지난해 안동 일대를 여행하면서 한 번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서울과 영양을 오가는 버스가 있어도 자동차가 아니면 접근하기 힘든 곳이다. 인구도 전국 지자체 가운데 울릉군 다음으로 가장 작은 곳) 당시에 영양에 와보고 싶었던 이유는 맹동산 일대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장관이라는 글을 인터넷 어딘가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궁화호를 타고 안동에 다다랐던..
-
진관(津寬)을 만나다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3. 2. 15:51
금암미술관과 셋이서 문학관 옆길을 따라 걷다보면 북한산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독립운동을 했던 진관사의 한 스님의 이름을 따 백초월길이라 부르는데, 백초월길을 따라서 일주문을 지나고 극락교를 건너면 방문객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마애아미타불이 나타난다. 그리고 불상의 시선이 머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계곡 너머 칙칙한 솔잎 사이로 풍화된 석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홍제루(弘濟樓)에 이르기까지 왼편으로 는 성긴 돌담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남동향으로 서 있는 홍제루의 낮은 마루 아래에는 색색의 연등이 빈틈없이 달려 있어, 그 밑에 들어서면 아늑한 다락방에 올라온 느낌이 든다. 홍제루를 지나 명부전(冥府殿)으로부터 대웅전에 이른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은 아니다. 하지만 정감 있고 아담한 느낌이 있..
-
서오릉에서 서어나무길을 걷다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2. 27. 00:35
서오릉의 북서 방면으로 그리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은 곳에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소나무길이고 다른 하나는 서어나무길이다. 동쪽으로 곧게 뻗은 소나무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서어나무길이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굽이굽이 뻗어나간다. 서오릉의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 일대는, 창덕궁의 비원처럼 사람의 손길이 많이 미치지 않아 자연적인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서오릉으로 말하자면 서울의 동쪽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 다음으로 왕릉군 가운데 두 번째로 커다란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조선 초기(세조의 맏아들(덕종)과 예종 시기)와 조선 후기(숙종과 영조대 시기)의 왕릉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 싱그러운 소나무를 보고 싶다면 예의 소나무길보다도 익릉의 양옆으로 들어선 소나무숲을 보는 ..
-
은평 한옥마을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2. 26. 03:25
# 북한산: 서울의 서쪽에서 올려다본 북한산은 아직 낯설기만 하다. 화강암이 우둘투둘하게 헐벗은 응봉 능선 자락으로 이른바 기자촌으로 알려졌던 곳에 한옥마을이 들어섰다. 지명에서 그대로 드러나듯 이 일대는 60년대에 언론인들의 집단거주를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서울 서북부를 회차지점으로 둔 버스노선에서 ‘기자촌’이라는 이름을 접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000년대에 들어 주민들의 수가 줄어들고 대대적으로 뉴타운이 조성되면서 이전처럼 언론인들과 문인들이 머물던 공간으로서의 색채는 희미해졌지만, 한옥마을 곳곳에는 동네의 오랜 이야기를 담은 박물관이나 문학관이 이 자리에 함께 했었던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 한옥마을: 안동의 하회마을, 전주의 한옥마을, 서울의 북촌과 익선동. 여러 한옥마을 ..
-
Epilogue. 다음 행선지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9. 12. 20:01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안동 여행에 관한 기록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영주역에서 안동역으로 온 이후 나는 곧장 안동 신시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오갈 때 시장골목을 겉으로만 봤었는데, 실제 시장에 이르니 휴무일인가 싶을 정도로 골목이 한산했다. 정확하게는 신시장에 인접한 청년몰이라는 곳인데, 전주에 있던 청년몰과 마찬가지로 청년들이 소규모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찾은 곳은 치킨을 파는 곳. 간단히 강정이라도 먹고 요기를 하려고 했다. 안동 시내에 있는 유일한 비프랜차이즈 치킨집이었다. 도착해서 보니 배달을 중심으로 하는 곳이라 매장이 크지 않았고, 그마저도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 협소했다. 가게 주인도 방문객을 보고 놀란 것 같..
-
다섯째날. 부석사(浮石寺)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9. 9. 13:13
버스에서 내린 종점 회차지에서부터 부석사의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유원지 같은 느낌이었다. 주차자에는 차가 거의 없고 식당들은 모조리 문을 닫았다. 그나마 부석사를 찾은 몇몇 방문객만이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지만 갈곳을 헤매는 행락객 같기도 하다. 코로나에 이례적으로 긴 장마까지 가세해 원래 움직이던 모든 것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정지화면을 보는 것 같은 이때의 광경은 이날 저녁에 찾은 청년몰(안동의 신시장 일부)에서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일주문을 통과해 조금 더 걸으면 예의 당간지주가 나온다. 소수서원에 남아 있던 당간지주가 옛 사찰의 흔적을 증언했듯이, 천왕문을 앞두고 대칭형의 당간지주가 왼편의 우거진 나무 사이로 살짝 모습을 숨기고 있다. 대단한 기계도 없던 시절에 이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