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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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날. 무너진 것을 바로잡다(旣廢之學 紹而修之)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30. 00:58
열차를 탈 때는 지하철을 탈 때에는 느끼기 어려운 재미가 있다. 가끔씩 나타나는 역(驛)이 반갑기도 하고―어떤 역은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역과 역 사이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청량리에서 중부선을 타고 안동으로 오는 동안 느꼈던 것은 경상북도 내에서도 북부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강원도만큼이나 산이 참 빽빽하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날은 안동역을 이용하는 날이다. 소수서원을 가기 위해. 뚜벅이 여행자에게 영주 여행이 편리한 점 하나는 소수서원과 부석사가 서로 멀지 않고, 같은 버스 노선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소수서원이 먼저 나타나고 부석사는 사찰이 만큼 산 안까지 조금 더 들어가야 한다) 이제 고민을 해야 할 것은 버스를 타기 위해서 어느 역에서 하차하느냐 하는 것. 버스는 풍기역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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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날. 봉황이 머무른 자리(鳳停寺)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25. 00:20
셋째날의 일기를 무려 네 개로 쪼개서 썼더니, 넷째날의 일기는 하나의 포스팅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많은 이동이 있었던 날도 아니다. 첫째날 도산서원을 둘러보고, 둘째날에는 청송 주왕산, 셋째날에는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둘러보는 일정을 지나왔다. 다해서 6일을 체류했던 안동 여행에서 둘째날부터 산행을 했던 게 조금 무리였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안동에서의 여행 4일차는 전날 예상했던 대로 날씨 상황이 전날보다 좋지 않았고, 이날 하루는 쉼표를 찍기로 했다. 이날도 어김없이 아침마다 들렀던 카페를 찾았는데 화요일은 문을 닫는 날이었다. 마침 안동의 유명 제과점인 맘모스 제과를 가보지 않았던 터라,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이날 오전은 맘모스 제과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베이커리이다 보니 문 여는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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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마을 안을 향해(하회종가길을 따라)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24. 02:07
이후의 하회마을 구경은 빠른 호흡으로 이어졌다. 하회마을의 남촌 지역을 구경하는 것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곧장 하회마을의 안쪽 깊숙이 들어갔다. 풍산 류씨의 큰 종가집이라고 하는 입암고택(立巖古宅)과 충효당(忠孝堂)을 차례차례 지나 신목이 자리한 삼신당 방면으로 진입했다. 시골에 가면 논밭 한가운데 마을 초입을 지키는 아름드리나무를 보는 일이 있다. 이 나무는 바로 그런 나무다. 삼신당(三神堂)은 말 그대로 세 신(神)을 모시는 공간인데 하회마을 심장부에 위치한 이곳을 하당(下堂)이라 일컫고 나머지 중당(中堂)과 상당(上堂)은 화산(花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화산을 지나쳐 오면서도 나머지 두 그루의 신목은 보지 못했다. 이곳은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종교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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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마을 바깥길로부터(하회남촌길을 따라)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17. 22:49
달팽이집 모양으로 동선을 그리며 하회마을을 둘러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장 바깥길부터 마을의 중앙부인 삼산당신목이 있는 위치까지 골목골목 둘러보면 좋을 것 같았다. 부용대가 바라다보이는 지점에서부터 만송정을 쭉 따라 콤파스로 원을 그리듯 하회강변길을 반시계 방향으로 빙 돌았으니, 길은 이제 자연히 하회마을의 동편에 얼기설기 뻗어 있는 하회남촌길로 이어진다. 짚으로 이엉을 얹어 놓은 아담한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니 고택 한 채가 시야에 들어온다. 양오당 고택이다. 하회마을은 잘 알려진 집성촌이기도 한데, 이곳에는 풍산 류씨가 많이 모여 살고 있다. 풍산은 안동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지명(地名)이다. 양오당 고택은 대문에 따로 문간을 두지 않고 탁 터놓아 시야에 시원하게 담기는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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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부용대(芙蓉臺) 쪽으로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11. 13:45
낙동강(洛東江) 안 도 현 저물녘 나는 낙동강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의 신열(身熱)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목선(木船)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은어(銀魚)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강안(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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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병산서원(屛山書院)과 배롱나무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10. 00:06
병산서원을 경유하는 하회마을 행 버스는 하루에 다해서 세 대가 있다. 지도상으로 봤을 때 병산서원을 경유한 다음에 하회마을을 들어가기가 어려워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하회마을을 먼저 들어갔다가 회차하여 다른 길을 통해 다시 병산서원으로 들어간다. 이날도 어김없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11시에 맞춰 교보생명 앞으로 갔다. 교보생명은 안동역에서 가깝기도 하고 안동 시내에서 가장 많은 버스가 다니는 정류소다. 전날 청송 주왕산을 가기로 하면서 안동 여행에 대한 정보를 짧은 시간에 이것저것 취합을 하다보니, 여행 셋째날부터는 대충 어떤 것들을 둘러보면 좋을지 윤곽이 그려졌다. 문제는 장마라는 날씨가 큰 변수였는데, 한밤중에는 장대비가 쏟아지다가 아침이 되면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낮에는 볕도 뜨고 여우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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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물안개 속 산행(A walk in the drizzle)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8. 12:50
산모기가 출몰할 때부터 알아차려야 했던 건데, 주봉까지 오르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후리메기 삼거리를 지나 등산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에, 무리한 산행을 자제하라는 살벌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개울을 지나 산길에 접어들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집요한 산모기도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대신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점점 주위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작년 늦가을에 찾았던 간월재의 기억이 떠올랐다. 억새 광경을 보러 갔다가 자욱한 안개 속에서 컵라면을 먹고 되돌아 왔던 기억. 차이라고 한다면 당시는 으슬으슬하게 몸을 적시는 안개가 끼었다면, 지금 안개는 서늘하고 시원한 느낌이 있었다. 어쨌든 안개가 끼면서 주위를 둘러보기가 어렵게 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어느 순간부터 후두둑후두둑 가볍게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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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폭포 산책(Promenade along the cascade)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7. 08:45
아주 가파르고 비좁은 절벽 틈에 자리한 용추폭포는 사진에 담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비는 구간이기도 했다. 계곡물이 바위 사이를 휘감아 나오면서 깊은 굴곡을 만들어 놨다. 유생(儒生)들이 유식(遊息)을 하던 공간이라는 안내가 있는데, 이게 그냥 비유적인 표현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통풍도 안 되는 옷을 입고 땀흘리며 이런 곳까지 어떻게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폭포수로 빠져나가기 전의 물줄기가 무서운 기세로 소용돌이를 그린다. 용추폭포가 어느 지역에서든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는 이름이라면, 절구폭포라는 이름은 접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절구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샛길로 약간 빠져서 200 미터 가량 걸어들어가야 하는데, 용추폭포를 둘러본 사람들이 굳이 절구폭포를 보기..